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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월세 보증금 500만원을 빌려주고 싶었다

입력
2020.04.15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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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긴급 금융지원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일 서울 중구 은행회관에서 열린 코로나19 대응 긴급 금융지원 현장 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미국 미식축구 스타였던 하인스 워드를 울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다고 한다. 한국계 혼혈인 그에게 어머니 김영희씨의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낯선 미국 땅에서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고 하루 16시간씩 일하며 홀로 아들을 키워낸 어머니의 삶을 떠올리다 보면, 워드는 눈물을 쏟는다는 것이다.

내 주변에도 워드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워드와 비슷한 친구가 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는 시대착오적 신념을 가진 잘 나가는 은행원이지만, 그 친구를 울리는 가장 쉬운 방법을 나는 알고 있다. 어떤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친할머니도 아니고 이름도 모른다지만, 친구는 9년 전 그날 이야기만 꺼내면 갑자기 흐느끼며 고개를 숙인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내 눈도 벌겋게 충혈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할머니 이야기는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내 얘기처럼 친숙하다. 2011년 초였다. 할머니가 친구가 일하던 인천의 한 은행지점을 찾아왔다. 남루한 옷에 흐트러진 머리, 허리가 완전히 굽어 지팡이에 의지했다. 한눈에 봐도 형편이 어려운 노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은행창구에 있던 친구에게 다가온 할머니는 정말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친구는 살면서 그런 목소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500만원을 대출 받을 수 있을까요. 빌린 돈은 어떻게든 꼭 갚겠습니다.”

조손 가정의 부양자로 단칸방에서 손주 둘을 키우던 할머니는 보증금 100만원에 약간의 월세를 내며 살고 있었다. 큰손주가 중학교에 곧 입학해 방 2개짜리 집으로 옮기고 싶은데, 그 집의 보증금이 500만원이었다. 서류를 검토해봤지만 예상대로 대출불가였다. 할머니는 재산도 없고 수입도 변변치 않았기에 ‘원칙상’ 대출은 힘들었다. 할머니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지만, 업무에 치이던 친구는 별다른 느낌 없이 노인을 돌려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는데, 객장에 앉아 있던 까까머리 손주 2명이 할머니를 부축하고 은행을 떠나고 있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한없이 부끄러웠다.

당시 친구는 1,000만원 정도는 ‘재량으로’ 빌려줄 권한이 있었지만, 그 놈의 원칙을 고수하고 말았다. 그날 밤 친구는 밤새 울면서 혼자 소주를 마셨다. 자신도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기에, 한동안 할머니의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건강한지, 손주들은 잘 자랐는지 한없이 궁금했다.

그날 은행엔 딸 결혼자금을 마련해주려고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으러 온 어머니도 있었다. 어머니가 2억원 대출을 신청하려고 하자, 딸은 “큰 집에서 살고 싶다”며 3억원을 해달라고 떼를 썼다. 2억원이든 3억원이든 담보가 확실해 대출엔 문제가 없었지만, 철부지 딸의 고집은 계속됐다. 보다 못한 친구는 모녀의 대화에 끼어들어 딸에게 한마디 했다. “2억원도 큰 돈입니다. 부모님이 고생해서 모은 돈이잖아요. 500만원 대출도 못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친구는 그날의 경험을 잊지 않고 이후 ‘재량 대출’을 실천해오고 있다. 담보가 확실한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그러나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사람에게 원칙을 내세우는 것은 때로는 너무 가혹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어려움을 겪는 기업과 자영업자, 소상공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금융기관들에게 당부했다. 신속한 지원이 필요한 만큼 고의가 아니라면 과실이 있어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했다. 한계상황에 몰린 기업인과 상인들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일시적으로 ‘원칙보다 재량을 강조한’ 문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적절한 것 같다. 이런 조건 저런 조건 따지다 보면 대출이 안 되는 이유는 100가지도 더 만들 수 있다. 반대로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지원이 가능하다. 결국엔 금융기관 마음먹기에 달렸다. 지금이 그 때다.

강철원 기획취재부장 str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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