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구조적 망각※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1917년 혁명 직후만 해도 러시아에는 평생 ‘문자’라는 것을 접해 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러시아의 심리학자 루리아가 그런 이들이 모여 사는 촌락을 찾아가 설문조사를 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글을 모르는 이들의 의식이 글을 쓸 줄 아는 도시 사람들의 그것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말이냐 글이냐. 이에 따라 의식 자체가 달라진다. 이 발견을 영문학자 월터 옹은 이렇게 요약했다. ‘매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구술문화의 의식
루리아가 마을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눈 덮인 먼 북쪽지방의 곰은 모두 색깔이 하얗습니다. 노바야 젬블라도 먼 북쪽지방이며 눈이 덮여 있습니다. 그곳의 곰은 무슨 색일까요?” 문자와 더불어 살아온 우리는 질문 속에 이미 답이 들어 있음을 안다. 하지만 평생 구술문화 속에서 살아온 이들은 당혹스러운 듯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검은 곰은 봤지만, 색깔이 다른 곰은 본 적이 없어서.”
동그라미를 그려 보여주며 뭐냐고도 물었다. 우리라면 ‘원’이라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접시, 체, 양동이, 시계, 달 등 구체적인 사물의 이름을 댈 뿐, ‘원’이라 답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신의 성격을 어떻게 판단하느냐?’는 물음에는 벌컥 화를 내며 ‘우리는 잘 하고 있어요!’라고 쏘아붙이거나, 혹은 겸연쩍게 ‘그걸 왜 나한테 물으세요?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지’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추론과 추상, 반성 능력이 타고난 것이 아니라 문자 사용을 통해 인공적으로 구축된 습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 눈엔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나, 사실 저들의 반응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생각해 보라. 경험에 의탁해 살아가는 이들이 가본 적도 없는 곳의 곰의 색깔을 어떻게 알겠는가? 또 접시와 시계와 달에서 굳이 원을 떠올릴 이유가 뭐 있으며, 자기에 대한 평가는 원래 타인이 하는 거 아닌가?
◇구술사회의 항상성
월터 옹은 구술문화의 또 다른 특성으로 ‘항상성’(homeostasis)을 꼽는다. “구술사회는 ‘항상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구술사회는 늘 현재에 살기에, 이제는 필요 없게 된 기억을 지움으로써 평형 혹은 항상성을 유지한다.” 구술사회는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의 기억을 재편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지금 필요 없는 기억을 지워버려도 되는 것은, 물론 글과 달리 말은 발화되는 순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리라.
일례로 영국 통치 하에 있던 나이지리아 티브족 사이에 법적 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법정에 증거로 제시된 부족의 족보가 40년 전 소송에 기록된 것과 달라진 것으로 드러난다. 구전 과정에서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춰 불필요한 기억을 지워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티브족은 자신들이 태고로부터 늘 같은 족보를 사용해 왔다고 주장했다. 과거의 법정기록도 소용없었다. “기록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가나 곤자국의 시조 작파는 나라를 일곱 지역으로 분할해 일곱 아들에게 나눠 다스리게 했다. 훗날 그 중 한 지역은 다른 쪽에 병합되고, 또 한 지역은 국경조정으로 사라진다. 그 후 노래로 전승되는 부족의 역사가 달라졌다. 부족 사람들이 작파에게는 원래 아들이 다섯이었다고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 대한 쓸 데 없는 호기심보다 그들에겐 현재의 상황이 훨씬 더 중요했던 것이다.
◇구조적 망각
구술사회는 이렇게 ‘현재’를 살기 위해 늘 ‘구조적 망각’을 실천한다. 이 구술문화가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더불어 되돌아온 모양이다. 유튜브는 말할 것도 없고, 문자를 사용한 인터넷과 SNS 소통 역시 그 성격이 구술적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을 대화체ㆍ구어체로 그대로 받아 적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매체는 의식을 재구조화한다.” 그래선지 요즘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구술적으로 바뀌어 가는 모양이다.
일례로 작년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당시 ‘뉴스타파’에서 후보의 장모에 관련된 의혹을 보도한 적이 있다. 그 기사 밑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장모가 무슨 짓을 하는지 사위가 어떻게 알아. 기자들은 너그들 장모 사생활을 다 아니?” 그런데 이 글을 올린 이가 최근에는 이런 댓글을 올렸다. “윤석열 장모는 기소도 안 했다며? 동영상 증거가 있어도 김학의는 무죄. 한국에서 법이란 검사를 위한 끼리끼리 해먹는 것?”
이 밖에도 사례는 많다. “장모 하는 일을 사위가 알아야 하냐?”고 따지던 이가 지금은 그를 “김선달보다 더 사기꾼”이라 부른다. “윤석열이 있어 검찰의 앞날을 밝게 본다”던 이는 “수십 곳 압수수색하던 놈이 수백억 잔고증명 위조한 것은 모른 척하냐?”고 타박이다. “장모를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본인 흠결이 얼마나 없는지” 보여준다던 이가 지금은 “잔고증명 조작이 불법인 걸 모를 리도 없거니와 설사 몰랐더라도 처벌의 대상”이란다.
◇영원한 현재
이 모두는 어느 포털사이트에서 사용자 댓글 이력을 공개하는 바람에 드러난 사례다. 이렇게 과거에 했던 발언이 드러나도, 저들은 아마 자기들은 말을 바꾼 적이 없다고 우길 게다. 이 항상성이 바로 구술적 의식의 특징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 댓글들을 캡처해 페이스북에 올리자 이런 댓글이 달린다. “두 글이 그렇게도 반대되는 글인가. 같은 입장이라도 상황에 따라서 저렇게 쓸 수 있는 것 아닌가.”
악플러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 의혹을 직접 취재해 봤다는 주진우 기자의 말이다. “제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자료도 받고 정리도 하고 취재를 해봤다. 깊게 해봤는데 신빙성이 하나도 없다. 문제 제기한 사람은 대법원에서 벌금 1,000만원 유죄 확정을 받았다. 그러니까 장모에 대해 막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자동으로 명예훼손에 걸릴 사안이다.” 이 발언 역시 그의 머리에선 지워졌을 것이다.
요즘 “식물총장”이라 조롱하는 재미에 사는 유시민 작가. 그런 그도 2016년 박영수 특검 때는 그를 ‘명언제조기’라 극찬했었다. “저는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지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명언’이라 평가한 이 발언도 지금은 제 업무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어느 정치검사에게 “조폭논리” 취급을 당하고 있다. 왜들 그러는 걸까. 그게 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치열하게 살려는 몸부림이다.
◇개인에서 분열자로
추미애 법무부장관은 7년 전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하는 채동욱 검찰총장을 내쫓고 국정원 대선개입 수사책임자인 윤석열 팀장을 내쳤다.” 그랬던 그가 지금 수사검사 내치고 총장마저 내쫓으려 한다. 그의 전임자도 그때 한마디 보탰다. “채동욱 윤석열 찍어내기로 청와대와 법무장관의 의중은 명백히 드러났다. 국정원 개입수사를 제대로 하는 검사는 어떻게든 자른다는 것. 무엇을 겁내는지 새삼 알겠구나!”
검찰총장을 공수처의 ‘제1호 수사대상’으로 삼겠다고 공언하는 전직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그는 총장임명 시 인사검증을 담당한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에서 벌써 지웠다. 그뿐인가. 심지어 대통령까지 이 ‘구조적 망각’을 실천한다. “우리 청와대든 정부든 집권 여당이든 만에 하나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엄정한 자세로 임해 주시길 바란다.” 이 발언도 애초에 없었던 것이 돼 버렸다.
‘개인’을 의미하는 영어단어는 ‘나눌 수 없다(in-dividual)’는 뜻을 갖고 있다. 즉 개인이란 정신의 통일성과 일관성을 갖춘 사람이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은 문자문화가 이룩한 위대한 성취라 할 수 있다. ‘개인’은 ‘A=not A’ 따위의 실없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반면 구술적 의식의 소유자들은 그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 있다. 특유의 항상성으로 지금 불편하거나 불필요한 기억을 지우는 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때 정신은 분열된다. 되돌아온 구술문화는 부르주아 개인을 분열자(dividual)로 해체시킨다. 현재를 살기 위해 늘 구조적 망각을 수행하는 분열자들의 집단 속에서, 애써 사유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개인은 당연히 고독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요즘 말 통하는 사람을 찾기가 참 힘들어졌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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