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화 작가 루씨쏜
등산하는 고양이, 수영하는 고양이
상상 풀어낸 익살스러운 풍경들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공존하길”
나른하고 따스한 봄날의 고양이. 루씨쏜 작가가 그린 고양이 민화는 딱 그 느낌을 담았다. 전통 민화는 대개 강렬한 오방색으로 채색하지만, 작가는 제주의 따스함과 사랑스러움을 은은한 파스텔 톤 물감에 고스란히 옮겨냈다. 민화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고 자신만의 빛깔로 칠해가는 루씨쏜 작가를 만났다.
조선시대 회화예술의 주류였던 문인화와 달리, 민화는 서민이 즐겨 그리고 향유한 그림이었다. 도상의 상징성이나 채색에 대한 나름의 규칙은 있었지만, 옛 민화작가들은 그 규칙을 때때로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역사가 오랜 민화가 최근 들어 현대적인 파격미로 뒤늦게 조망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그 안에서 새로움을 찾던 루씨쏜 작가에게 민화가 매력적으로 느껴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생명의 빛을 그리는 화가
제주로 오기 전, 서울에서 작은 화실을 운영하던 작가는 한때 호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결혼도 했다. 디자인과 현대미술을 공부하며 다른 삶을 꿈꿨지만, 오랜 타국 생활에 지쳐갈 무렵 귀국을 결심했다. 그때 떠오른 곳이 제주였다. 아무 연고도 없었지만, 자연을 사랑하고 바다를 좋아했던 그가 꼭 살아보고 싶던 땅이었기에.
2015년 겨울 무작정 내려온 제주에서 작가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수묵 중심의 한국화도, 호주 체류 시절 공부했던 디자인도 아닌 민화였다. 대학 졸업 후에는 줄곧 본명으로 작업했지만, 제주에서 민화를 시작하면서 ‘루씨쏜’이라는 작가명도 새로 지었다. 호주 체류 시절 쓰던 영문 이름 ‘루시아’에 실제 성씨인 ‘손’을 된소리로 바꾼 이름이다. 가톨릭에서 빛의 성녀를 뜻하는 루시아에서 따 온 작가명처럼, 그의 그림도 빛과 생명의 온기로 가득하다.
◇전통 회화와 현대 민화의 기발한 조우
루씨쏜 작가의 민화에는 조선시대 그림에서 모티브를 따 온 화풍이 자주 보인다. 단순히 차용한 게 아니라, 그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해 비교하며 보는 즐거움이 있다. 예컨대 변상벽의 ‘묘작도’에서 참새를 탐내던 고양이는, 민화 ‘제주 수국’에서 수국꽃다발과 함께 프러포즈하는 고양이로 등장한다. 때론 중국 고사에서 착안한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핑크빛 서핑보드에 올라 파도를 가르는 고양이는, 바람을 타고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간다는 뜻을 담은 ‘승풍파랑(承風波浪)’의 고사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전통회화와 관계없이 작가의 상상만으로 새롭게 창작된 고양이 민화도 있다. ‘제주 플리마켓’이란 작품에는 세화 해변에서 열리는 ‘벨롱장’ (세화해변 앞에서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반짝 장터를 뜻한다) 분위기를 익살스럽게 풀어낸 고양이 커플이 등장한다. 돗자리에 늘어놓은 판매용 물건들이 실제로 고양이가 씀직한 장난감과 밥그릇, 케이프와 고양이 식탁 등이어서 웃음을 자아낸다.
전통 문자도(文字圖)에는 한자가 등장하지만, ‘파라다이스 문자도’란 작품에는 한자 대신 영문 ‘Paradise’가 파스텔 톤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등장한다. 그 밖에도 동백이 흐드러지게 핀 돌담, 핑크빛으로 가득한 한라산, 파도가 일렁이는 김녕 앞바다 등 제주의 자연 풍광을 누비는 그림 속 고양이의 발자취를 따르다 보면, 마치 고양이의 안내로 제주를 여행하는 듯하다.
여행자가 아닌 거주민의 시선으로 바라본 제주 길고양이들도 드문드문 보인다.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만큼은 고양이를 인간과 동등한 생명체로 받아들이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느끼길 바라며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민화에 등장시킨 것이다.
“작업실에 자주 놀러 오는 길고양이 가족이 있어요. 밥을 얻어먹곤 마당에 앉아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다 가지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제주 사람들은 도시에 비해 길고양이에게 관대한 것 같아요.”
◇따뜻함을 가르쳐 준 고양이, 도롱이
그의 그림에 대부분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 된 계기가 있다. 5년 전 새끼 고양이 도롱이를 입양하면서다. 따뜻한 아이가 되라는 마음을 담아, 제주어로 따뜻하다는 의미를 담은 ‘맨도롱’이란 이름도 지어주었다. 요즘은 맨도롱보다 애칭인 도롱이로 부른다.
“제주에 정착하면 고양이를 꼭 키우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도롱이를 가정 분양으로 입양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도롱이 생일을 물어보니 제 생일과 같은 게 아니겠어요. 그 순간 묘연이란 게 이런 걸까 싶었죠.”
특별한 묘연으로 만난 도롱이는 처음 집에 와서 일주일간 계속 숨고 울기만 했지만, 그 뒤에는 잘 적응해서 아들 같은 존재가 되었다. 조용하고 순한 성품이라 더욱 사랑스럽고 한편으론 마음이 쓰인다고. 친구도 친척도 없는 제주에 정착해 외로움을 느낄 때, 도롱이는 큰 의지가 되었다.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혼자 있길 즐기는 성격, 친해지기까진 오래 걸리지만 가까워지면 따뜻한 도롱이 성격이 저와 많이 닮았더군요. 아이 없이 남편과 둘이 지낸 기간이 길었는데, 도롱이와 살면서 웃을 일도 행복한 일도 많아졌어요.”
어릴 때 작가의 집으로 온 도롱이는 외동으로 커서 그런지 자기가 사람인 줄 안다. 꼭 사람처럼 행동하는 도롱이의 모습이 그림에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실제로 루씨쏜 작가의 민화 속 고양이들은 사람처럼 행동한다. 맨몸으로 등장하는 고양이도 있지만, 사람처럼 배낭을 메고 등산을 가거나 수영복을 입고 수영도 한다.
동화적인 상상으로 풀어낸 풍경이지만, 이런 연출에는 인간과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공존했으면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이것이야말로 작가가 바라고 꿈꾸는 파라다이스의 모습이다. “도롱이를 키우며 인간 외의 존재에 대해 애정을 갖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이 그림에 그대로 스미게 된 것이다.
◇그림 속 고양이를 따라 제주를 여행하다
화가인 아내가 서귀포시 보목동에 화실을 열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 셰프 남편은 작업실 근처에 제주 식재료로 만든 지중해 음식을 파는 식당을 열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든든한 남편이 있었기에 낯선 타지 생활도 잘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마주친 뭇 생명에 대한 사랑과 남편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2019년에는 제주 살이 이야기를 민화로 녹여낸 독립출판물 ‘고양이 부부의 제주 민화 선물’을 출간했다. 온라인 글쓰기 플랫폼 ‘브런치’에 연재했던 글과 그림을 묶어 69쪽짜리 화집으로 만든 것이다.
“그림 속에 우리를 꼭 닮은 고양이 부부가 나와요. 제주 이곳 저곳을 자유롭게 유랑하는 고양이 부부의 발자취를 따라 가다 보면, 제가 제주에 살면서 만난 다양한 이야기와 풍경 그리고 사람들 이야기를 접할 수 있죠.”
전시 때면 늘 도록을 만들지만 전시가 끝나면 버려지는 게 아까워서, 작품 속 의도를 잘 전하면서도 생명력이 긴 책으로 직접 만들어보고 싶었단다. 소량 제작한 독립출판물은 제주 내 책방과 기념품 가게에만 입점했는데도 2쇄까지 매진돼, 3쇄는 영문판으로도 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루씨쏜 작가는 개인 작업을 하는 틈틈이 일주일에 세 차례 외부 수업을 진행하고, 여행자를 위한 원데이 클래스도 연다. ‘해녀, 동백꽃, 제주’ 등의 글씨에 제주의 문화와 자연을 그림으로 담는 제주 문자도가 인기란다.
“고양이도 소중한 생명이고, 무척 사랑스러운 우리의 친구”라는 작가는 “한 명이라도 제 그림을 통해 고양이를 이해하고, 사랑의 눈길로 바라봐주는 사람이 생긴다면 보람이 있겠다”고 밝혔다. 따스한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4월, 루씨쏜 작가의 그림 속을 거닐며 제주 여행을 떠나 보자.
글= 고경원
고양이 전문 출판사 야옹서가 대표, 18년차 고양이 작가.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2007)를 시작으로, 여행기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2010), 인터뷰집 ‘작업실의 고양이’(2011), 사진에세이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2013), 사진집 ‘둘이면서 하나인’(2017)을 썼다. 2009년 9월 9일 ‘한국 고양이의 날’을 창안해 고양이 인식 개선에 힘쓰고 있다.
자료 제공= 루씨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