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서울 종로양복점
서울 을지로3가역 12번 출구에 물린 골목을 따라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신축 오피스빌딩을 만난다. 3대째 대를 이어 양복을 만들고 있는 국내 최고(最古) ‘종로양복점’이 입점해 있다. 1916년 종각 인근에서 개업 후 피맛골에 터를 잡았지만 개발에 밀려 지난 2002년부터 한동안 광화문 사거리 인근 새문안교회 옆에서 영업하던 양복점이다. 그리고 9년 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을지비즈센터 6층 18호. 20㎡ 남짓한 공간이, 과연 지난 세기 개성과 함흥에 지점까지 두고 직원 200명을 부렸던 양복점이 맞나 싶지만, 대를 이어 온 장인정신만큼은 오롯이 남았다. 15일 투표일에도 불구하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던 가게를 찾았다.
◇3대에 걸친 양복점
창업주는 이두용(1881~1942)씨. 인평대군의 후예로 줄곧 서울에서 살았어도 빈한했던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취업한 일본인 양복점이 결정적 계기였다.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재단일을 보면서 양복업의 성장 가능성을 내다보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 만에 돌아온 그가 1916년 종로 보신각 옆에 차린 양복점이 이 노포의 모태다.
이두용씨는 일본에서 배운 선진 기술을 바탕으로 사업을 키워 나갔다. 일본인 양복점들의 견제가 심했지만, 실력과 신용으로 무장한 그를 넘어뜨릴 수는 없었다. 1928년에는 개성과 함흥에 지점까지 개설했다. 당시 종로양복점 직원은 200여명에 달했다. 종로양복점의 전성기였다.
가업을 물려 받기 위한 9남매 간 물밑 경쟁이 적지 않았지만 두용씨는 4남 해주(1914~1996)씨를 선택했다.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나와 은행 일을 하던 그를 만주의 한 양복전문회사에 취직시켰다. 양복점을 끌고 가는 데 필요한 실무를 익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2대 주인 해주씨는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한 뒤 반세기 가까이 양복점을 운영했다.
◇기성복과의 싸움
3대 주인 경주(75)씨는 해주씨의 5남1녀중 3남. 1980년대 기성복 시대가 열리면서 양복점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하던 때 아버지로부터 열쇠를 넘겨받았다. 경주씨는 “‘이걸 하면 항상 새 양복을 걸치고 다닐 수 있겠다’는 생각에 뛰어 들었는데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양복지를 생산하던 제일모직이 양복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전국의 양복점들이 나서 불매 운동에 나섰지만, 대기업을 상대로 한 이들의 싸움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에 불과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진 종로 대로변의 양복점들이 뒷길로 빠지거나 새로 생긴 빌딩으로 들어갔다. 더러는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그 무렵에서야 그는 무릎을 쳤다. ‘음식 장사하는 사람 좋은 음식 못 먹고, 옷 장사 하는 사람 좋은 옷 못 입는다던 말이 딱이구나.’ 양복점 하면 좋은 옷, 멋진 옷 입고 지낼 줄 알았던 생각은 보기 좋게 물 건너갔다. “좋은 옷은 팔아야지 하는 생각에 못 해 입었어요. 해 입기가 아까웠지요.” 그런 이씨를 보고 그의 아내(71)는 타박했다. “당신이 모델인데, 멋지게 입고 일을 해야지.” 매일 아침 양복점으로 나서는 셔츠와 넥타이 선택은 지금도 그의 아내 몫이다.
◇‘역사’에 양복을 입혔다
100년이 넘은 이 노포를 출입한 손님들을 열거하자면 입이 아플 정도다. 드라마 ‘야인시대’ 주인공, 협객 김두한도 이 집 단골이었다. 이씨는 “일본 패거리로부터 종로의 한국 상인들을 보호해주면서 우리 집에서 20년을 옷을 해 입었다”고 했다.
뿐만 아니다. 이시영 초대부통령도 이 집 단골이었고 국회가 여의도로 옮겨 가기 전, 종로가 실질적인 정치 1번지 시절엔 국회의원 등 고관대작들이 많이 찾았다. 고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고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등 기업인들도 이 집에서 한 옷을 입고 세상을 호령했다. 이씨는 “이런 분들이 오면 한 번에 서너 벌씩 옷을 맞췄다”며 “팁도 두둑하게 놓고 갔다”고 회고했다. 80, 90년대 기성복이 대세를 이룰 때지만, 있는 사람들은 따로 맞춰 입으면서, 못해도 월 200벌씩은 만들던 때다.
당시 손님들 특징은 대부분, 손님(남성) 혼자서 오거나 친구들끼리 와서 재단을 하고 갔다는 점. 하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손님들도 달라졌다. 요즘 손님은 남자 혼자 오는 법이 없다. 부부가 함께 온다.
“그만큼 여자들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이야기겠죠. 옷 지을 옷감을 놓고도 이게 좋다 저게 어떻다 훈수를 놔요. 그러면 남자들은 끽소리 않고 들어요.” 이 분야에서 잔뼈 굵은 이씨가 봐도 여자들의 선택이 탁월하단다. 그러나 문제가 아주 없지는 않다. “자꾸 깎아달라고 해요.” 이 곳 옷은 양복지에 따라 한 벌에 100만~300만원씩 한다.
◇품질에 승부, 새 손님 찾아야 생존
옷 한 벌 가격치고 적은 돈은 않지만 여기에는 적지 않는 노력과 시간이 들어간다. 3만 땀의 바느질 뒤에야 한 벌의 양복이 나온다. 이씨는 “아무리 기계가 좋다고 해도 70% 정도는 사람의 손으로 이뤄진다”고 했다. 바느질뿐만 아니다. 수십 개의 부속을 잘라 다듬고, 그 작업을 위해 20군데 이상의 채촌(採村ㆍ신체 치수 재기)이 이뤄진다. “지금까지 채촌하면서 신체 사이즈가 같은 사람을 못 봤어요.” 아무리 기성복이 좋다지만, 맞춰 입는 옷을 따라올 수 없다는 뜻이다.
기성복에 밀리면서 일감이 한창 때의 10분의 1로 줄었어도 이씨는 가격보다는 질에 승부를 걸었던 덕에 종로양복점은 버틸 수 있었다. 또 그 덕택에 서울미래유산으로까지 선정되면서 홍보 효과는 덤으로 얻었다. “제주도서도 아침에 와서 재단하고 저녁에 가봉 한번 걸쳐 보고 돌아가요.” 재단 후 가봉까지 며칠씩 걸리던 일을 한나절로 줄인 것도 그가 살아남기 위해 도입한 전략이다. 완봉된 옷은 택배로 1주일 뒤 집에서 받아볼 수 있다. 이씨는 “식당들이야 단골이 평생 가도 나이 들면 옷을 안 해 입으니 옷집 단골은 길어야 30년”이라며 “새로운 손님 발굴도 이제는 중요한 일이 됐다”고 했다.
◇금녀의 영역 ‘재단사’… 4대 대물림 기로에
가업을 이어받아 40년 동안 종로양복점을 이끌면서 후회 한번 한 적 없다. 그러나 그는 요즘 들어 부쩍 20년 전 일 하나가 머리를 맴돈다.
가업을 물려받겠다며 나선 딸(43)을 일언지하에 말린 일이다. “여자가 어디 재단을!” 당시 딸은 디자인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의상학까지 공부한 터였다. 아들(47)이 화가의 길로 일찌감치 들어선 상황이었다.
“손님들이 모두 남자예요. 채촌을 하자면 불가피하게 ‘터치’가 일어나고, 몸에 걸친 가봉을 매만지면서 다듬는 일인데, 딸에게 맡길 수가 없었지요.” 그 뒤로 금녀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크레인, 전투기 조종에 여성들이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이 달리 들기도 했으나 때늦은 후회였다. 딸은 현재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대에서 가업이 끊기더라도 ‘종로양복점’이 오래도록 남았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 재단을 배우고 싶다며 찾아오는 이들이 더러 있어도 맡겨도 될지 걱정이 앞선다. ‘보기 좋은’ 재단만 배우려고 하는 탓이다. “옷 짓는 공정을 전부 알아야 재단을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힘든 과정들은 제쳐 놓고 이것만 하려고 드니….”
개업 100주년이던 지난 2016년에 맞춰 계획했던 대물림은 실패했지만, 그는 좀 더 기다려 볼 참이다. “아직 10년은 더 할 수 있습니다.”
글ㆍ사진 정민승 기자 ms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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