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총선은 더불어민주당 163석, 비례 위성정당인 더불어시민당 17석 합해 180석을 확보한 여당의 승리로 끝났다. 유권자들은 ‘정권 심판론’과 ‘샤이 보수론’을 내세운 미래통합당의 호소를 외면했다. 20대 총선의 키워드였던 ‘제3당 돌풍’은 이번 총선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기별 여론조사의 흐름을 차분히 살펴보았다면 여당의 승리는 예견된 결과였다. 선거운동 기간 중 당시 여당의 공천 파동으로 야당 심판론에서 정권 심판론으로 여론의 흐름이 역전되었던 20대 총선과 달리, 21대 총선은 이변의 조짐 없이 여당 우위의 구도가 유지되었다. 여당의 안정적인 우세가 쉽게 예측되는 상황이었음에도, 정권 심판론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뿌리 깊었다. 정권 심판론의 착시를 고착화한 3가지 허상을 짚어 본다.
◇ ‘대통령 임기 중반 총선=중간평가=정권 심판론’ 자체의 허상
야당이 정권 심판론을 고수한 데에는 대통령 임기 중반에 치러지는 총선은 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이며, 중간 심판 선거에선 유권자들이 표로 심판을 해 왔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과연 그런가. 2000년 이후 총선을 살펴보면, 대통령 임기 중반에 열린 총선이 몇 번 되지도 않고, 정권 심판론으로 여야의 다수당 교체가 실제 일어난 사례 자체를 찾기도 어렵다.
2000년 16대 총선은 김대중 정부 임기 3년차에 치러져 야당인 한나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했으나, 1당 교체는 아니었다. 또 한나라당 의석 증가분(122석→133석)보다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의석수 증가분(98석→115석)이 더 컸다. 노무현 정부 2년차였던 2004년 17대 총선은 탄핵 역풍으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을 확보했다. 2008년 18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 임기 1년차에 치러져 역시 여당인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2012년 19대 총선, 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대통령 지지율이 20~30%대까지 하락하면서 정권심판론이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대 총선은 이명박 정부 임기 5년차에 치러져 중간평가로 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통합당이 패배해 ‘정권 심판론=야당 심판’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 임기 4년차에 치러진 20대 총선에선 여당인 새누리당 의석이 146석에서 122석으로 감소하고,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102석에서 123석으로 증가해 1당이 교체되었다. ‘임기 중반 정권 심판론’의 유일한 사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전문가들마저 ‘대통령 임기 중반 선거 = 중간 심판 선거’를 기정사실화한 게 의아하다.
◇여론조사에 대한 확증 편향
① 10%의 ‘샤이보수’가 존재하며 ARS 조사가 정확하다는 오해
정권 심판론에 대한 맹신은 ‘일반전화 여론조사 불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한국일보 총선 여론조사를 비롯해 대부분의 일반전화 면접조사에서 코로나19 정국 이후 △대통령 지지율이 60%대까지 상승 △미래통합당 지지율은 20%대 정체 △정권 안정론(야당 심판론)이 정부여당 심판론보다 우세 △지역구별 판세 조사에서 여당 후보가 우세 등 현상이 일관되게 나타났다.
그러나 녹음된 기계음으로 조사를 하는 자동응답전화(ARS) 조사에서는 △미래통합당 정당 지지율이 30%를 넘어 민주당과 한 자릿수 내 접전 △일반전화 조사와 동일한 지역구임에도 여야 후보가 접전 등의 결과가 눈에 띄었다. 일반전화조사에 비해 무당파 비율이 과소대표된 것도 특징이었다.
보수 야당과 보수 언론 등은 일반전화 면접조사에서 무당파로 분류되는 집단의 다수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샤이 보수’라고 믿었다. 샤이 보수가 기계음으로 진행하는 ARS 조사에서 속내를 더 잘 드러내고, 무당파는 어차피 투표장에 가지 않기 때문에 ARS 조사가 실제 투표결과를 더 잘 반영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여론조사 판세보다 실제 보수 후보 지지율이 높았던 지역은 대구ㆍ경북, 부산ㆍ울산ㆍ경남 지역 정도였다. 경합 지역인 수도권과 충청 지역에선 여론조사 판세대로 여당이 큰 우위를 유지해 ‘샤이 보수론’을 무색케 했다.
② ‘일반 전화조사=진보가 과대 대표된 조사’라는 오해
‘일반전화조사는 진보 편향 조사’라는 주장도 대두됐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다’는 비율이 50%를 상회하는 등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가 과대 대표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시절 선거 여론조사에선 ‘직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다’는 비율이,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과거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다’는 비율이 높게 나왔다. 미국 등 모든 나라 선거 여론조사에서 예외 없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치적 태도가 약한 응답층의 승자 편승 경향(밴드 웨건 효과) △ 현재와 과거 시점의 판단 변화에 따른 인지 부조화 해결 등 차원에서 승자를 지지했다는 응답이 실제보다 높게 나오기 마련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편차가 더 커진다는 데엔 학계에서 큰 이견이 없다. 필자가 참여한 2012년 동아시아연구원 대선 패널조사 결과를 보면,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찍었다는 비율은 50.3%, 문재인 후보를 찍었다는 비율은 49.2%로 실제 조사 결과에 근접했다. 그러나 동일 응답자를 대상으로 ‘5년 전 17대 대선에서 누굴 찍었는가’를 물어본 결과는 이명박 후보 지지가 55.0%로 실제 득표율 48.7%보다 높았다. 승자 편승 응답은 이례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여론조사 결과를 승자 지지층이 과대 대표된 결과로 해석하면서 보수가 여론의 열세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③ 보수는 보수를 찍었다는 오해
선거결과를 두고 민주당과 통합당은 결집했고, 중도층이 이탈해 통합당이 패배했다는 진단들이 나온다. 그러나 중도층의 이탈만으로 전체 국회 의석 중 5분의 3을 여당이 독식한 결과를 설명하기는 충분치 않다. 실제로 한국일보의 이달 7, 8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통합당 지지를 표명한 지지층에서는 적극적 투표의사 비율이 88.4%로, 민주당 지지층(87.4%)과 대등했다. 또 통합당 지지자의 83.7%가 실제 지역구에서 통합당 후보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민주당 지지자 중 82.7%가 지역구에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겠다고 답한 것도 일치한다.
그러나 이념 성향별 지역구 후보 투표 선호를 보면, 통합당 후보 지지율은 중도층에서 민주당 후보 지지율에 크게 밀렸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당이 진보층에서 지지를 이끌어낸 비율(69.1%)에 비해 통합당이 보수층에서 지지를 이끌어낸 비율(55.2%)이 뒤진다는 것이다. 즉, 스스로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10명 중 4명 이상이 이탈했음을 의미한다. 보수가 보수 후보를 찍은 비율이 진보가 진보 후보를 찍은 비율에 크게 못 미친 것이 여당 우위 구도를 굳건히 한 셈이다.
◇왜 스윙보수는 돌아오지 않았나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때 보수당을 이탈한 ‘스윙 보수’는 왜 통합당으로 돌아가지 않았나. 통합당 지지로 돌아간 보수와 돌아가지 않은 이탈 보수 사이에는 여전히 ‘탄핵의 강’이 흐른다. 양측 사이엔 박 전 대통령 탄핵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시각 차이가 발견되며, 이는 문재인 정권 심판론에 대한 뚜렷한 온도 차이를 낳는다.
한국일보·한국리서치의 2020년 신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전에 콘크리트 지지층이라 불리던 새누리당 지지자 291명 중 박 전 대통령 탄핵을 여전히 찬성한 비율이 41.5%(121명)에 달했다. 과반을 약간 넘는 160명(54.9%)만 탄핵에 반대 입장이 뚜렷했다. 또한 과거 새누리당 지지자 중 탄핵에 찬성했던 사람 사이에선 47.5%만 문재인 정권 심판론에 찬성했다.
태극기부대로 상징되는 익스트림 보수(극단 보수)에 대한 태도도 콘크리트 보수 지지층의 재결집을 억제하는 요인이다. 한국일보·한국리서치의 올해 3월 조사 결과, 국정농단 사건 이전 새누리당 지지자(305명) 사이에선 ‘통합당이 태극기 부대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찬성(139명)과 반대 의견으로(132명) 양분됐다. 태극기 부대와의 연대에 찬성한 사람 중 77.4%는 통합당 지지로 흡수된 반면, 반대한 사람은 59.0%가 ‘돌아가지 못한 보수’로 남아 있다.
종합하면, 박 전 대통령 탄핵 문제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고 과거와 단절하는 단호한 혁신을 하지 않고는 통합당이 ‘이탈한 보수’를 복원하기 어렵다. 통합당이 실체 없는 ‘샤이 보수론’ ‘여론조사 편향론’에 빠져 있는 동안 ‘돌아가지 못한 보수’와 중도층이 문 대통령에게 힘을 실어주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이것이 21대 총선 결과를 좌우한 셈이다.
정한울(한국리서치 여론분석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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