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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다른 생각]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교양

입력
2020.04.20 18: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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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일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강주환ㆍ박정희씨 부부가 떨어져 앉아 손 소독제를 건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3일 서울역에서 부산으로 가는 강주환ㆍ박정희씨 부부가 떨어져 앉아 손 소독제를 건네고 있다. 연합뉴스

‘다락방이 있는 집’은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가 1896년에 발표한 짧은 소설이다. ‘어느 화가의 이야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소설의 화자는 풍경화를 주로 그리는 남성 화가이다. 소설은 주인공이 지주 벨로쿠로프의 영지에 머물렀던 몇 년 전 일을 회상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거기서 그는 리디아와 제냐라는 자매를 알게 된다. 언니 리디아는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고 활달한 언변에 지적인 아름다움이 넘치는 여인이고, 제냐는 책과 예술을 사랑하는 조용한 성격의 동생이다. 어느 날 벨로쿠로프와 주인공은 자매의 집을 방문한다. 길게 이어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벨로쿠로프는 ‘어떤 대화든지 논쟁으로 이끄는 학창 시절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혼자 흥분하며 지루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다가 그만 식탁 위에 있는 소스통을 옷소매로 쳐서 넘어트리는 실수를 하고 만다. 그러나 자매는 이를 못 본 척 넘어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 어둡고 적막한 길에서 그는 화가에게 한탄한다. “훌륭한 교양이란 식탁에 소스를 흘리지 않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흘렸을 때 모른 척하는 것이죠.” 벨로쿠로프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 그래요. 이들은 참 훌륭한 집안이네요. 난 이제 이런 사람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어요. 아, 정말 싫네요. 나에겐 매일 일, 일, 일밖에 없어요.” 그리고 나서 그의 슬픔은 이어진다. “정말 괴로운 건 말이죠, 일을 이렇게 많이 해도 아무도 날 제대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벨로쿠로프라는 불쌍한 사내의 이 탄식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소스와 교양 이야기에 집중하기로 하자. 그의 제법 훌륭한 설명에 따르면, 우리는 교양을 식탁에 소스를 흘리지 않는 것과 같은 특정한 행동의 문맥에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정해진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일, 혹은 그것을 하는 일은 너무도 간단한 과제에 속한다. 그런 단순한 차원에 교양의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교양은 타인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성립하는 덕성이다. 내가 실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남의 실수에 눈감아 주는 것이 바로 교양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여기서 교양의 문제는 영어에 대한 진심 어린 사랑도, 유창한 영어 실력도 아니다. 엉터리 영어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 앞에서 깔깔대며 웃음을 터트리지 않는 것이야말로 교양의 진정한 핵심이다.

벨로쿠로프의 이 설명은 서구 근대 개인주의의 강고한 전통을 대변하고 있다. 나의 정체성은 타인의 간섭과 방해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고유한 영토에서 확보된다. 나의 권리가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권리도 나에 의해서 존중받아야 하고, 나의 실수가 용서받으려면 타인의 실수도 나에 의해서 용서받아야 한다. 그러니 개인주의적 교양의 시선은 근본적으로 타인이 아니라 자신의 몸으로 향하고 있다. 타인의 권리를 만에 하나라도 방해할지 모르는 내 입과 손과 발을 잘 살펴서 내 이성적 판단 아래에 관리하는 능력, 그것이 교양의 본령이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고 스스로를 훈련하는 것, 당연히 이런 교양이 세상사 잡다한 일에 파묻혀 있는 벨로쿠로프에게 허용될 리 없다. 더구나 그는 인정까지 갈구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교양의 이런 의미는 우리가 오랫동안 서구 사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열등감의 주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타인이 나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그의 선택과 취향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민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들은 오랫동안 싸워왔다. 당연히 이런 의미에서의 계몽적 교양을 확보하는 일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주요 과제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 관련 사태의 전개는 또 다른 의미의 시민적 교양을 드러냄으로써 우리 사회의 잠재적 역량에 대한 낙관적 비전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 힘든 시기에 우리는 공적인 질서에 대한 존중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최대한 앞세우면서 모범적으로 대처해 왔다. 특정 지역이나 외국인, 혹은 특정 종교 집단에 대한 혐오도 이 존중과 배려의 덕성으로 잘 이겨내고 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의 교양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리를 잘 살피고 그 약한 곳을 배려하는 일까지 의미하고 있다. 바이러스에 대한 우리 방역 체계의 대처가 세계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시민적 배려가 새로운 교양의 내용으로 공고하게 자리 잡는다면 이것이야말로 국제 공동체에 대한 우리의 참된 기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양은 배려이다. 죽음 앞에 위태로운 자가 죽음 앞에 위태로운 타인에 대해 배려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참된 교양이다.

사실 이 배려의 시민적 교양은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시작되지 않았다. 문 대통령이 말한 바 있듯이, 이 모든 것은 생명에 대한 우리 사회의 감각을 완전히 새롭게 뒤집어 놓은 세월호에 힘입고 있다. 이제 생명은 가장 앞선 가치가 되었다. 이렇게 우리는 세월호를 이끌고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김수영 철학박사ㆍ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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