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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연재] 함부로 죽지 못하는 '킹덤' 속 조선 군주... 선택적 기억 강요하는 정치 의례

입력
2020.04.27 06:00
수정
2020.04.27 08:07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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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교수 한국이란 무엇인가] <11>기억의 공동체

※‘칼럼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한국의 정체성, 역사, 정치, 사상, 문화 등 한국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찾아 나섭니다. ‘한국일보’에 3주 간격으로 월요일에 글을 씁니다.

지난해 2월 24일 '반 천황제 운동 연락회' 등 단체들이 아키히토 일왕의 마지막 재위 기념식에 맞춰 도쿄 중심가인 긴자에서 천황제 폐지 거리 집회를 열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지난해 2월 24일 '반 천황제 운동 연락회' 등 단체들이 아키히토 일왕의 마지막 재위 기념식에 맞춰 도쿄 중심가인 긴자에서 천황제 폐지 거리 집회를 열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넷플릭스에서 절찬 상영 중인 조선 시대 배경의 좀비물 ‘킹덤’은 두 가지 모순에서 출발한다. 첫째, 왕은 죽었지만 죽어서는 안 된다. 왕의 외척 조학주 대감이 자기 핏줄을 왕으로 만들고 싶기에, 딸 계비 조씨가 아들을 출산할 때까지 왕은 살아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조학주는 명의 이승희를 불러 이미 죽은 왕을 좀비 상태로나마 살려 놓는다. 최고 존엄으로서 왕은 적절한 후계자를 얻을 때까지 살아 있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죽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산 것도 아니지만 죽은 것도 아닌 존재, ‘언데드(undead)’가 된다.

둘째, 왕은 좀비가 됐지만 더러워서는 안 된다. 원래 좀비는 씻지 않는다. 어떤 좀비물에서도 세수하는 좀비나 치실질하는 좀비, 속옷을 갈아입는 좀비를 본 적이 없다. 또 다른 공포물의 주인공 뱀파이어와 구별되는 좀비만의 특징이다. 그러나 ‘킹덤’은 좀비가 된 왕을 씻기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좀비는 흑화(黑化)된 존재라지만, ‘킹덤’ 속의 죽은 왕은 씻겨지고 분이 칠해져 백화(白化)된 존재다. 최고 존엄으로서 왕은 함부로 흑화돼서는 안 된다.

지난해 11월 15일 나루히토 일왕이 제복을 입고 도쿄 왕궁에서 전날부터 밤샘 행사로 열리는 추수감사 의식 '다이조사이'를 치르고 있다. '다이조사이'는 해마다 치르는 추수 감사제 성격의 궁중 제사 중 일왕이 즉위 후 첫 번째로 행하는 비밀 의식으로 일본 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꼽는다. 교도=AP연합뉴스
지난해 11월 15일 나루히토 일왕이 제복을 입고 도쿄 왕궁에서 전날부터 밤샘 행사로 열리는 추수감사 의식 '다이조사이'를 치르고 있다. '다이조사이'는 해마다 치르는 추수 감사제 성격의 궁중 제사 중 일왕이 즉위 후 첫 번째로 행하는 비밀 의식으로 일본 왕실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로 꼽는다. 교도=AP연합뉴스

함부로 죽지 못하는 것이 ‘킹덤’ 속 조선 군주의 운명만은 아니다. 일본의 천황도 마찬가지다. 일본 천황은 특이하게도 만세일계(萬世一系)를 내세운다. 이민족의 정복이나 황위 찬탈 없이 하나의 가계가 천황으로 죽 이어져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문이 제기된다. 개개의 천황은 죽지 않았는가. 한 천황이 죽고서 다음 천황이 계승했다면, 그것은 연속이라기보다는 단절을 전제로 한 계승이 아닌가. 일본의 민속학자 오리구치 시노부(折口信夫, 1887~1953)에 따르면, 천황령(天皇靈)의 존재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다. “혈통 상으로는 지금의 천황이 앞선 천황으로부터 왕위를 계승한 것이지만, 믿음의 차원에서는 앞선 천황이나 지금 천황이나 같은 존재이며, 한결같이 아미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의 자손이다. 신체는 대대로 바뀌어 가지만 영혼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진무(神武)천황이나 지금 천황이나 모두 같은 것이다.” 즉 개별 천황의 몸은 죽어 사라지더라도, 천황의 영혼은 육체를 건너가며 지속되기에, 과거의 천황이나 지금의 천황이나 근본적으로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영혼의 존재를 설득시키려면, 머리 속 관념만으로는 부족하고 가시적인 의례가 더해져야 한다. 고대 일본에서는 천황이 죽으면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2년에 이르는 ‘모가리(殯)’ 의례를 행했다. 여기서 ‘빈(殯)’이란 장례라고 할 때의 ‘장(葬)’과는 다르다. 장례가 아니라 장례를 치르기 전에 시신을 한동안 안치해두는 일이다. 그래서 ‘논어’에서도 친구가 죽어, 돌아갈 곳이 없는 경우에 공자는 내 집에 빈소를 차리겠다(殯)고 말할 뿐 장례를 치르겠다고는 말하지 않는다.(朋友死, 無所歸, 曰於我殯) 마찬가지로, 천황이 물리적으로 죽어도 남은 사람들은 곧이어 천황의 시신을 매장하거나 화장하지 않고, 한동안 안치해둔다.

일본학 연구자 남근우에 따르면, “이 모가리 상태에 있는 천황은 생리적으로는 분명히 죽은 것이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아직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 게 아니다.” 그리고 이 시체 안치 기간은 가변적이다. 마침내 육체와 영혼이 분리됐다고 판단돼야 비로소 본격적인 장례가 치러지고 후계의식이 진행된다. 그때 죽지 않고 이어진다는 천황령을 계승하는 의식이 거행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이죠사이(大嘗祭)다. 오리구치 시노부에 따르면, 이 다이죠사이 의례에서, 후계자는 천황의 시체와 동침을 한다. 그것도 신체를 시체에 부착시키고서.

그러면 언제가 돼야 이제 전임 천황의 육체와 영혼이 완전히 분리됐다고 선언할 수 있는가. 즉, 과연 언제 전임 천황이 그야말로 완전히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가.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사안이다. 남근우는 “어떤 사회적, 정치적인 사정이 생기게 되면 영육 분리의 최종판단이 인위적으로 연장되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현대의 정치인들이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선거제도를 개편하려고 부심하듯이, 자신들이 보기에 가장 적임자가 후계자가 될 수 있게끔 필요에 따라 전임 천황의 죽음 선언을 연장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킹덤’의 조학주 대감이 이미 죽은 왕을 좀비로나마 살려 놓았듯이.

그렇다면 ‘킹덤’이 이런 특이한 일본 천황제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서구에도 이에 비견할 만한 전통이 존재했다. 독일 출신이었으나 미국 프린스턴 고등 연구소에서 말년을 보낸 유대계 지성사가 에른스트 칸토르비치는 기념비적 저작 ‘군주의 두 신체’에서 군주의 계승 시기에 발생하는 단절을 방지하기 위해서 흥미로운 정치 신학이 필요했음을 잘 보여줬다. 칸토르비치의 연구에 따르면, 중세 통치자에게는 두 개의 몸이 있었다. 하나는 사멸하는 몸, 다른 하나는 사멸하지 않는 몸. 죽지 않는 또 하나의 몸이 있기에 후계자는 그 몸에 접속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몸이라는 픽션이 없었다면, 전임 통치자가 죽고 후임이 아직 계승하지 않았을 때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정치적 공백이 발생하고 마는 것이다.

아룬델 백작의 송장 기념물. 출처 위키피디아
아룬델 백작의 송장 기념물. 출처 위키피디아

어떤 정치적 공백도 없이 권위와 질서가 연속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선 사멸하는 인간의 가엾은 신체와는 구별되는 또 하나의 신체를 가시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멸하는 육체와 사멸하지 않는 육체라는 두 종류의 몸(인형)을 나란히 보여줄 수 있는 안치대 양식이 필요했다. 사진에 보이는 것과 같은 아룬델 백작의 송장 기념물(Cadaver monument)이 그러한 양식의 예다. 20세기 전반기에 함부르크 대학교의 미술사학 교수로 활동했던 어윈 파노프스키는 이러한 기념물을 이단 침대 기념물(the ‘double-decker’ monument)이라고 불렀다.

그렇다. 우리에게는 두 개의 존재가 있으며, 따라서 두 번 죽는다. 평소에 입고 먹고 싸고 말하고 숨 쉬던 물리적 존재는 수명이 다하면 죽는다. 그러나 또 하나의 존재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애도하고 계승하고 보내주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 누군가 그를 계승하기를 포기할 때, 기억하기를 포기할 때, 애도하기를 포기할 때, 마침내 떠나 보낼 때 그는 비로소 죽는다. 마침내 무(無)로 돌아간다. 다시 말해서, 어떤 존재는 그를 되살릴 수 있는 타자가 없을 때 비로소 완전히 죽는다. 두 번째의 생사는 자신이 아니라 남은 타자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이 두 번째 생사에 어떤 식으로든 관계한다. 명나라는 오래 전에 망했지만 조선의 왕은 대보단(大報壇)을 세우고 연 1회 2월 상순에 택일해 명나라를 기념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런 면에서 어떤 왕은 제사장이기도 하다. 역사학자는 하필이면 이미 사라진 존재에 대해서 애써 사료를 그러모아 서사를 부여하고 기억한다. 그런 면에서 어떤 역사가는 제사장이기도 하다. 만해 한용운은 망해버린 조국을 두고 노래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인은 제사장이기도 하다. 애도 역시 기억의 행위이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것(어떤 빛 같은 것)이 꺼져 있는 상태. 그 어떤 ‘불만’이 막혀 있는 그런 상태가 아니다. 애도는 고통스러운 마음의 대기 상태다. 지금 나는 극도로 긴장한 채, 잔뜩 웅크린 채, 그 어떤 ‘살아가는 의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어떤 애도하는 사람은 제사장이기도 하다.

그는 죽었지만 우리 가슴에 영원히 살아 있을 거라고 말할 때, 혹은 어떤 나쁜 기억을 머리에서 지우고 싶어 머리채를 흔들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하나의 대상에 깃든 두 개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망각할 것인가. 시공을 넘어 지속되는 한국이란 공동체는 이 선택적 기억과 망각의 결과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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