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진영 패인은 이념 아닌 실력과 태도
시대 변화 뒤처져 늙고 병든 체질로 전락
다 버리지 못하면 보수도, 나라도 길 없어
진단부터 틀렸다. 분열, 공천 실패, 전략 부재, 막말 따위는 병인(病因)이 아니다. 심각한 기저 질환에 수반되는 발현 증상일 뿐이다. 면역체계가 작동치 않을 만큼 병세가 악화한 보수 진영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치명타를 맞고 격리 병실로 유폐됐다.
어차피 질 거면 아예 무참하게 지는 게 낫다고 봤다. 그래서 선거 결과를 뼈, 장기 다 들어내고 체질을 몽땅 바꾸는 대수술의 전기로 삼길 바랐다. 병증 몇 가지 손 봐서 될 단계는 훨씬 지났다.
알다시피 우리 주류 정당들은 사실 인물 정당에 가깝다. 박정희 때 경제개발에 우선 동원되고 직접 수혜 입은 당시 엘리트 기득권 세력과, 그에 소외돼 김대중에 한과 기대를 투사할 수밖에 없던 주변부 연합의 승계다. 주류 보수와 비주류 진보의 구도도, 질긴 지역주의도 여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 사회의 특이 이념지표인 북한에 대한 태도 역시 같다.
어쨌든 모든 것은 노무현에서 시작됐다. 그의 죽음이 이 강고한 구도에 첫 균열을 냈다. 당연시해온 주류 계층과 가치, 지향 등이 바뀔 수 있음을 많은 사람이 깨달았다. 그 즈음 ‘우리 사회는 다시는 노무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썼다. 비록 현실 정치엔 실패했어도 그가 던진 (개혁) 화두에서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므로.
그럼에도 보수 진영은 줄곧 퇴행의 길을 갔다. 박근혜는 아예 시계를 아버지 시절에 맞추었다. 그나마 유승민처럼 시대 변화를 읽고 낡은 보수를 변화시키려던 시도들은 원천 봉쇄됐다. 시대 정신과 유리되고, 급기야 탄핵으로 패닉에 빠진 보수 진영은 제도권 정당이 품을 수 없는 극단적 부류까지 급하게 끌어안았다.
얼추 세를 맞췄다고 착각한 그들은 이후 장외 투쟁, 무조건 반대, 막말 등에 매달렸다. 이념은 그렇다 쳐도 태도 측면에서 관용 품격 여유 같은 것은 원래 보수의 덕목이었다. 상대적으로 기반이 약하고 불안정한 진보 측이 자주 독하고 거칠었다. 이게 뒤집혔다. 여당이 대체로 더 품격과 여유를 보였다. 주류 교체를 성급히 단정짓긴 그렇지만 ‘태도의 전도’는 분명 그 징후로 볼 만한 것이었다.
그래도 현실 능력 결여는 진보엔 오랜 불신 요인이었다. 실제로 경제, 외교, 국민통합 등에서 헤매고, 조국 사건에서 도덕성마저 의심받던 여권은 돌연 코로나 국면에서 놀라운 문제해결 능력을 보여 주었다. 보수의 자산과도 같은 안정욕구조차 그들에게로 옮겨졌다.
만약 통합당이 코로나 국면에서 정부에 대한 묻지마 비방 대신 “초기 미스는 있었으되 이후는 잘 대응하고 있다. 국가재난 상황인 만큼 우리도 뒷받침하겠다”고 했으면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때 많은 사람이 선택의 고민을 거뒀다.
인물 격차도 컸다. 선거를 이끈 여권의 지도부 중진들이 거의 선택받은 반면, 야권에선 전현 지도부가 궤멸했고, 투쟁 전위에 섰던 이들이 거의 퇴출됐다. 중진 중에서 비교적 합리적이고 처신이 진중한 몇몇만 살아남았다.
자명하다. 진보 진영은 비주류의 불안감에서 어떻든 진화한 반면, 보수 진영은 주류의 허상을 붙들고 그저 늙어만 갔다. 시인이자 정치사상가인 R.W. 에머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제 ‘보수에 남은 것은 추억 뿐’이다. 잔뜩 노환 든 보수, 이게 이번 선거에서 확인한 결론이다.
물론 민심은 언제든 바뀌므로 보수 진영이 생환할 길은 얼마든 열려 있다. 그러나 당장은 난망이다. 패인 분석과 반성에서부터 새 진로와 정치철학 등을 놓고 몇 날을 끝장 토론해도 모자랄 판에 달랑 30분 의총에 전화 몇 통 돌려 새 지도체제라고 내놓았다. 이 또한 늙고 힘 부친 노인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김정은 위중설은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상황인지를 거듭 상기시켰다. 대북 관계에, 글로벌 환경 변화에, 경제 활력 회복에, 국민 통합에…, 보수가 마냥 무력하게 있어선 안 될 이유는 숱하다. 그야말로 다 버리고 새 체질을 만들지 못하면 보수 진영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더는 길이 없다는 뜻이다.
도대체 통합당에 지킬 뭐가 남아 있는가.
고문 jun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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