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n번방 막아라] <상>잔인한 범행, 무딘 법
작년 유죄 102건 중 법정형 높은 아청법 적용은 40%뿐
2016년 7월 10살에 불과했던 A양은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모(23)씨를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눈 뒤로 악몽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달콤한 말에 속아 경계심 없이 알려 준 개인정보를 전씨가 악용하면서다. 전씨는 A양에게 대화 중 주고 받은 사진 등을 가족과 지인에게 뿌리겠다며 나체 사진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A양이 이를 거부하면 “집으로 찾아가겠다”는 협박을 일삼았다. 전씨는 A양에게 특정 성적 행위가 담긴 사진을 보내고 해당 장면을 따라 하는 사진을 찍어 보내도록 강요하는 등 수위를 높여갔다. 전씨의 잔인한 범행은 3개월 간 지속됐다.
전씨의 범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같은 해 12월까지 비슷한 수법에 당한 11~14세 미성년자만 7명. 전씨는 이렇게 모은 성착취물을 메신저 단체대화방에 올려 공유하다 수사당국에 덜미가 잡혔다.
하지만 대구지법 영덕지원이 전씨에게 내린 판결은 징역 10개월에 성폭력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 전씨의 범행엔 아동ㆍ청소년을 이용한 음란물 제작 행위가 엄연히 포함됐지만, 검찰 및 법원 단계에서 아동ㆍ청소년 성보호법(아청법) 상 음란물 제작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대신 이보다 법정형이 낮은 아동복지법 상 음행 강요 등으로 구형과 선고가 진행됐다. 아청법 상 음란물 제작죄의 법정형은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유기징역’으로 높지만, 아동복지법의 음란행위 강요ㆍ매개ㆍ성희롱(17조 2항)은 ‘10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머물러 양형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른바 ‘n번방’사건을 계기로 아동ㆍ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엄벌 목소리가 높지만 현실은 여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7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김지선 선임연구위원이 아동ㆍ청소년 이용 음란물 제작ㆍ판매ㆍ유포 등 범죄로 2018년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102건(공공장소 불법촬영 및 소지 범죄 제외)을 분석한 결과, 최고 무기징역을 선고할 수 있는 아청법 11조가 적용된 판결은 41건(40.2%)에 불과했다. 대신 검찰과 법원은 주로 아청법보다 법정형이 낮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4조 ‘카메라 등 이용 촬영’(제작 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 영리 목적 유포 시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아동복지법 17조 2항을 근거로 판단했다. 성폭력처벌법이 근거가 된 판결은 37건(36.3%), 아동복지법은 24건(23.5%)에 달했다.
물렁한 법 적용은 솜방망이 처벌로 이어졌다. 아청법이 적용된 41개 사건 중 절반 이상(51.2%ㆍ21건)이 실형을 선고 받은 반면, 아동복지법의 실형 비율은 41.7%(10건), 성폭력특별법은 21.6%(8건)에 불과했다. 대신 102개 사건 가운데 절반이 넘는 53건(52%)에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벌금형으로 처벌받은 경우도 10건으로 10%에 육박했다.
법정형이 가장 높은 아청법이 적용돼도 형량은 법정형 하한에 미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판사가 초범, 반성, 합의 등 피고인의 사정을 참작해 형기를 감경하기 때문이다. 김 연구위원에 따르면 아청법이 적용된 41건 중 절반을 넘는 63.4%(26건)가 이러한 이유로 감경을 받았다. 법원의 관대한 처분에 따라 아청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 받은 21명의 평균 형량은 법정형 하한(5년)의 절반을 조금 넘는 31.2개월에 그쳤다. 가장 낮게는 6개월이 선고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 성폭력특법법 적용 판결 중에 감경 사례는 2건에 불과했고 아동복지법 적용 판결 중에는 아예 하나도 없었다.
법원의 솜방망이 처벌 관행이 지속되는 한 정부의 디지털 성범죄 처벌 강화 방안은 무용지물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김 연구위원은 “아동ㆍ청소년 이용 음란물 범죄의 경우 아청법 적용만 제대로 해도 높은 수준의 처벌이 가능하다”며 “검찰ㆍ법원의 올바른 법적용과 이를 뒷받침할 실무상의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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