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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기의 굿모닝 2020s] 각자도생 전쟁터에서 ‘더불어 사는 공동체’ 복원해야

입력
2020.04.28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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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사회적 가치 

기택(송강호) 일가족이 부잣집에 취직하기 위해 집사와 기사 등 기존 피고용자들을 하나씩 잘라내는 영화 ‘기생충’의 세계는, 같은 계급 내에서 연대 대신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각자도생의 전쟁터다. 영화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기택(송강호) 일가족이 부잣집에 취직하기 위해 집사와 기사 등 기존 피고용자들을 하나씩 잘라내는 영화 ‘기생충’의 세계는, 같은 계급 내에서 연대 대신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각자도생의 전쟁터다. 영화의 한 장면. 바른손이앤에이 제공

최근 사회과학에서 ‘사회적 가치(social value)’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개념도 드물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첫째, ‘경제적 가치’에 익숙한 이들에게 사회적 가치는 낯선 개념이다. 경제적 가치가 이익에 있다면, 사회적 가치가 추구하는 것은 뭔가. 둘째, 각자도생의 시대적 분위기는 사회적 가치의 의미를 재발견하게 한다. 왜 우리 시대에 사회적 가치가 주목 받는가.

 ◇사회적 가치란 무엇인가 

사회적 가치는 두 개념으로 이뤄져 있다. ‘사회적’이란 말과 ‘가치’라는 말이다. ‘가치’란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의 존재의 이유를 일러주는 그 무엇이다. 그 무엇이 누구에겐 화폐나 권력일 수 있고, 또 누구에겐 꿈이나 사랑일 수 있다. 이 가치를 개인이 아니라 사회의 차원에서 추구하는 게 사회적 가치다. ‘사회적’이란 말에는 ‘같이, 함께, 더불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 동안 적잖은 토론이 이뤄져 왔음에도 사회적 가치는 여전히 낯설다. 사회혁신가 제프 멀건에 따르면, 사회적 가치는 한 사회에서 어떤 현상ㆍ사물ㆍ행위 등이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고 바람직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형평과 공정, 공유와 협력, 투명과 신뢰 등이 사회적 가치를 이룬다.

사회적 가치가 부상한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였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배경이 중요했다.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사회적 한계’였다. 1980년대 이후 표준적 패러다임으로 군림해온 신자유주의 경제이론 및 정책은 사회의 지속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2014년 경제개발협력기구(OECD)는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심각한 소득 불평등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경제적 효율성을 넘어 사회적 형평 등의 사회적 가치가 이렇게 부각됐다.

다른 하나는 신자유주의의 ‘철학적 한계’였다. 경쟁을 최우선하는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개인들은 자신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전력투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다수 나라에서 문화자본인 대학입시 경쟁은 그 출발점이었고, 구조조정으로부터의 살아남기는 본무대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 다수는 자기 삶에서 불안과 불행을 느끼며 살아왔다. 경쟁에 의한, 경쟁을 위한, 경쟁의 삶은 바로 그 경쟁을 넘어선 협력 등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게 했다.

사회적 가치와 연관해 주목할 개념은 경영학자 마이클 포터와 컨설턴트 마크 크레이머가 제시한 ‘공유가치 창출(CSV)’이다. 공유가치 창출이란 기업이 사회가 추구하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기업 자체도 직간접적인 이익을 얻는 경영원리를 말한다. 포터와 크레이머는 공유가치 창출이 기업 활동의 부수적 산물이 아니라 핵심 목적이 되고, 이를 통해 경영 전략의 혁신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공유가치 창출 이론은 사회적 가치 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국 사회의 ‘사재기 광풍’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드러낸 신자유주의의 단면일 수 있다. 지난달 14일 미 워싱턴주 시애틀 소재 대형 마트 코스트코 앞에 개점을 기다리는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시애틀=로이터 연합뉴스
미국 사회의 ‘사재기 광풍’은 코로나19 팬데믹이 드러낸 신자유주의의 단면일 수 있다. 지난달 14일 미 워싱턴주 시애틀 소재 대형 마트 코스트코 앞에 개점을 기다리는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시애틀=로이터 연합뉴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사회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제공했다. 세넷은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에서 신자유주의 아래 직업과 인간성의 변화를 주목했다. 신자유주의 경제의 유연성은 개인 직업 선택의 유연성을 강제하고, 이 유연성의 증대가 경쟁을 강화시킴으로써 인간성의 침식을 가져왔다는 게 그의 분석이었다.

인간성이란 스스로를, 동시에 타자를 존중하는 태도와 가치를 뜻한다. 이를 위해선 자아에 대한 배려와 공동체에 대한 연대가 요구된다. 세넷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개인의 삶을 표류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공동체를 각자도생의 전쟁터로 전환시켜 버렸다. 각자도생이라는 인간성의 파괴를 넘어서 연대와 협력이라는 인간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것은 사회적 가치에 담긴 문제의식의 중핵을 이룬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를 성취하기 위해선 이중적 전략이 요구된다. 첫째, 사회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다. 둘째,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가치는 동시에 추구돼야 한다. 사회적 가치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할 경우 그 조직은 지속 가능하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사회적 경제,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은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사회적 가치란 현재 우리 인류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새로운 시도들을 함의한다. 사회학자 고동현 등의 ‘사회적 경제와 사회적 가치’에 따르면, 사회적 가치란 지금까지 수익성과 효율성을 중시하는 사회적 환경과 양적 성장 위주의 정책으로 발생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의 삶의 질, 사회의 질, 지속가능성을 높여가는 것을 포괄한다.

 ◇2020년대와 사회적 가치의 미래 

2020년대에 사회적 가치의 미래는 그렇다면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오늘날 사회적 가치가 점점 중요해지는 까닭은 우리 인류가 서 있는 자리에 대한 성찰에서 찾을 수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 등이 2017년 내놓은 ‘거대한 후퇴’는 최근의 지구적 흐름을 거대한 후퇴의 징후들로 독해한 바 있다. 거대한 후퇴란 세계 질서가 전진하던 걸음을 멈추고 뒤로 물러서는 형국을 지칭한다.

거대한 후퇴를 가져온 원인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의 이중적 위기였다. 먼저 위기의 신자유주의는 유연화와 규제완화를 계속 추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격차와 불평등을 더욱 증대시켰다. 한편 동요하는 세계화 과정 속에 민주주의의 일국적 조정 메커니즘은 허약해지고, 이 정치사회의 딜레마는 시민사회에 가감 없이 전이돼 연대와 통합의 문화적 자원을 소진시켰다. 더하여, 이러한 거대한 후퇴에 2020년대 벽두인 현재 코로나19로 나타난 위험의 세계화가 중첩되고 있다.

리처드 세넷은 저서 ‘투게더’에서 새 공존 질서를 구상하려면 ‘협력’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제안한다.
리처드 세넷은 저서 ‘투게더’에서 새 공존 질서를 구상하려면 ‘협력’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지구적 흐름에 대해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신자유주의의 원자화된 개인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나아가 앞으로 예견될 비규칙적인 바이러스 폭풍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현재 우리 삶을 훼손시키고 있는 사회가 연대와 협력이 살아 있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하는 것은 인류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과제라 할 수 있다. 세넷은 ‘투게더’에서 말한다.

“프로이트는 누군가 질 높은 삶을 사는 비결이 무엇인지를 묻자 ‘사랑하고 일하라’고 대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 한나 아렌트는 공동체적 삶을 하나의 소명으로 끌어안았지만, 그가 말한 공동체는 대부분의 빈민들이 직접 경험하는 종류의 공동체는 아니었다. (...) 우리는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 가치는 사회적 가치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

세넷이 강조하는 바는 새로운 협력의 상상력이다. 인간은 홀로 존재하는 동시에 더불어 살아간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선 협력의 방법을 제대로 익히고 그것을 삶 안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한다.

협력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실천함으로써 형평과 공정, 투명과 신뢰, 존중과 헌신 등의 사회적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 불가능한 미래만은 아니다. 개인의 차원에서 함께 살아가는 생활방식으로 삶을 바꾸고, 기업의 차원에서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영을 도모하며, 국가의 차원에서 성과우선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넘어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게 점점 더 중요한 인류의 당면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사회와 사회적 가치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가치에 대한 적극적 관심은 2014년 입법 청원된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 법안’에서 출발한다. 이 법안은 인권 보호, 안전, 노동권, 사회적 약자에의 기회 제공, 대기업ㆍ중소기업 간의 상생과 협력 등을 위시한 공동체의 이익 실현과 공공성 강화 등의 포괄적인 사회적 가치의 목록을 제시한 바 있다.

2018년 3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첫 정부혁신 전략회의가 정부서울청사 별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리고 있다. 이 회의에서 정부는 예선 배정과 정책 추진 등에 사회적 가치를 적극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8년 3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첫 정부혁신 전략회의가 정부서울청사 별관 국제회의장에서 열리고 있다. 이 회의에서 정부는 예선 배정과 정책 추진 등에 사회적 가치를 적극 반영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8년 문재인정부는 정부혁신전략회의를 열어 사회적 가치에 기반한 정부혁신을 추진했다. 정부가 국민주권의 대리인인 만큼 예산 배정, 정책 추진 및 업무 평가에서 사회적 가치를 적극 반영하겠다는 이러한 정부혁신은 시의적절하고 미래지향적인 국가개혁의 출발점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회적 가치에는, 사회학자 박명규가 지적하듯, 우리 사회 가치 영역의 우선 순위를 재조정하는 기획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회적 가치는 공동체적 차원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가는 것만큼 소중한 가치가 없는 시대에 이미 들어섰다고 나는 생각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사랑’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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