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포항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
드라마의 힘은 강했다. ‘일제 수탈의 흔적을 미화했다’, ‘역사를 왜곡한다’는 등의 뒷말은 쏙 들어갔다. 경북 포항시 구룡포읍 일본인 가옥거리에는 일본의 전통의상인 유카타를 입고 사진을 찍던 관광객은 온데간데없고 동백이 장사하던 술집 까멜리아 앞에서 포즈를 잡는 사람들로 연일 북새통이다. 일본인 가옥거리라는 글자가 크게 적힌 길 입구에는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라는 표지판이 큼지막하게 하나 더 달렸다.
구룡포항은 포항에서도 차로 40분 정도 달려야 할 정도로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곳이다. 드라마가 종영하고 5개월이 지났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캠페인이 무색할 만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입구에서 만난 한 동네 주민은 “코로나로 전국이 난리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걱정할 정도”라며 “여기는 탁 트인 바닷가라 다들 안 걸린다 생각하고 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 전체가 ‘동백꽃 필 무렵’ 촬영지
포항 구룡포읍 일본인 가옥거리는 구룡포수협이 운영하는 수산물판매장 뒤편부터 근대역사관까지 길이 457m, 폭 3~4m의 좁은 골목길이다. 일방통행으로 차 한 대가 겨우 지날 정도라 평소에도 차가 잘 다니지 않는다. 드라마 방영 후 사람들이 몰리면서 차량 진입이 더 어려워졌다. 대신 차가 다니지 않아 여러 명이 손을 잡고 걸어도 될 만큼 걷기에는 더 없이 좋은 길이 됐다. 거리에는 팔짱을 끼거나 손을 맞잡고 곳곳을 둘러보는 연인과 가족이 쉽게 눈에 띈다.
길이 457m의 작은 골목길이지만 볼거리, 즐길거리, 먹거리가 가득하다. 계단을 오르내리며 드라마에 나온 동백의 가게와 집, 동백이 용식과 다정하게 걷던 길, 용식의 엄마인 덕순의 게장 집, 연쇄 살인범 까불이가 몰래 고양이 사료를 놔두던 곳 등을 찾아 다니다 보면 서너 시간은 금세 지나간다.
드라마 방영 후 단연 인기가 높은 곳은 주인공 동백의 술집 까멜리아다. 입구에 놓인 옛날 우체통과 마당, 작은 우물은 일부러 꾸며 놓은 듯하다. 드라마와 똑같은 외관만 보고 둥근 테이블이 놓인 동백의 술집을 기대하고 문을 열면 다소 실망할 수 있다. 이곳은 포항시가 구룡포읍 주민들을 위해 임차해 예술활동 공간으로 제공한 ‘문화마실’이다. 은은한 차 향이 도는 건물 안에는 전통민화와 아기자기한 공예품이 전시돼 있다. 문화마실을 운영하는 포항문화재단은 관광객들이 아쉬워하지 않도록 꽃잎과 수십 개의 전구로 불을 밝혀 용식이 까멜리아 뒤편에서 동백에게 고백할 때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도시재생 사업의 원조, 일본인 가옥거리
문화마실은 2층짜리 목조주택이다. 100년쯤 된 이 집은 과거 일본인이 운영한 여관이었다. 너무 오래 방치해 곧 부서질 것처럼 낡았지만, 포항시는 집주인의 동의를 얻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이곳을 포함해 1920년대 일본인이 집단 거주하던 시절 요릿집과 수산물창고 등 건물 28개동을 정비했다. 작업 이름은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 관광자원화 사업.’ 2년여에 걸쳐 국비 37억원 등 총 86억원을 들여 일대를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바꿨다. 일제 착취 흔적의 산 교육장,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취지였다.
구룡포읍 일본인 가옥거리 조성사업은 집 몇 채를 고치는데 끝나지 않았다. 도보로 골목길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도록 바닥에는 아스팔트가 아닌 보도블록을 깔았다. 가옥거리 중앙의 집 몇 채는 뜯어냈다. 대신 그 자리에 사찰의 일주문처럼 기와지붕과 나무기둥으로 된 큰 문을 세웠다. 언덕 위 공원에서 가옥거리 중심까지 일자로 탁 트이면서 계단 맨 위 구룡포공원에는 구룡포항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생겼다. 계단에 앉아 아기자기한 집들과 포구를 배경으로 동백과 용식이 서로 바라보며 웃고 있는 드라마 포스터가 이곳에서 촬영됐다. 까멜리아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포토존이다.
가옥거리와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구룡포공원에서 담을 따라 150m쯤 걸으면 나지막한 나무 문에 담쟁이 덩굴로 꾸며 놓은 동백의 집이 나온다. 이곳 역시 인기 사진촬영 장소다. 공원에서 동백의 집까지 걷는 내내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와 소형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어촌 마을 구룡포의 풍광이 눈에 들어온다.
골목 바깥은 대게ㆍ과메기 거리
공원에서 다시 가옥거리로 내려가 까멜리아 반대편 끝까지 걸으면 1920년대 이곳에서 살았던 일본인 하시모토 젠기치의 살림집이 나온다. 세월의 때가 묻어 형편없이 망가진 집을 포항시가 매입해 근대역사관으로 고쳤다. 100년 전 일본인의 가옥 구조와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인 가옥거리 입구 건너 버스정류장까지 근대 쉼터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1920년대는 여관과 창고, 요릿집 등이 있는 거리였지만, 일본인들이 대거 빠져나간 뒤에는 좁은 길에 낡은 건물이 가득한 골목이었다. 가옥거리 정비사업이 마무리되고 옛 영화에서나 본 듯한 이색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자, 일본식 라면이나 찻집, 옛날 물건을 파는 가게 서너 곳이 생겼다. 포항시가 지원과 홍보를 아끼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진 못했다. 한ㆍ일 관계가 좋지 않을 때는 일제 침탈의 역사를 왜곡하고 미화한다는 비판까지 받았다. 지난해 드라마 방영 전만 해도 잠잠했던 이곳은 최근 카페만 7, 8곳이 동시다발로 생겼다. 또 거리는 물론 계단 위 공원에까지 치즈나 떡볶이 등 먹거리와 액세서리 등을 파는 노점이 등장했다.
가옥거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박주연씨는 “자고 일어나면 인테리어 공사와 함께 가게가 들어서 이곳 상인들도 깜짝 놀란다”며 “코로나로 경기가 좋지 않은데도 이 일대는 임대료와 집값이 오르는 분위기다”고 말했다.
일본인 가옥거리는 주변에도 구경할 곳이 많다. 골목을 빠져 나오면 동해안을 대표하는 대게 거리가 이어진다. 흔히 대게는 경북 영덕과 울진의 특산물로 알려져 있지만 최대 집산지는 구룡포다. 동해안 전체 어획량의 60%를 차지한다. 덕분에 가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겨울에는 해풍에 꾸덕꾸덕 말린 과메기, 여름에는 활어회를 막 썰어낸 물회가 유명할 정도로 구룡포항 곳곳에서 싱싱한 수산물을 맛볼 수 있다. 생선과 국수를 넣어 칼칼하게 끓인 모리국숫집과 막 쪄낸 찐빵을 팔아 전국적으로 유명한 분식가게도 근처에 있다. 가수 탁재훈, 이상민이 방송에 나와 맛있게 먹던 홍게 짬뽕집도 가옥거리 앞에 있다.
가옥거리 뒷산에 있는 동백의 집에서 100여m를 더 걸어 올라가면 지난 2016년옛 구룡포 동부초등학교 자리에 들어선 과메기문화관을 볼 수 있다. 총 4층 규모의 건물로, 과메기를 비롯해 구룡포 어업 역사와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체험시설을 갖췄다. 스크린 속 꽁치를 향해 공을 던지면 과메기로 변하는 모션슈팅과 제트스키 게임도 있어 어린이들에게 인기다.
포항시는 드라마 인기 덕에 몰려드는 관광객을 놓치지 않기 위해 구룡포 일대 개발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인 가옥거리 활성화 사업이 지난 3월 문화체육관광부의 ‘2020 계획공모형 지역관광개발’ 사업에 선정됐다. 올해부터 2024년까지 5년간 국비 100억원과 지방비 100억원이 투입된다. 포항시는 구룡포에 위치한 전시관인 예술공장을 활성화하고 해양 먹거리와 연계 관광상품을 개발할 계획이다.
김용직 포항시 문화예술과장은 “드라마 종영 후 20, 30대 젊은 층이 많이 찾고 있어 청년들이 창업하고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한다”며 “까멜리아 외에도 주변 근대역사 문화자원을 활용해 잠시 스쳐가는 거리가 아닌 오래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바꿔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포항=글ㆍ사진 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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