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52>노래하는 이소정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서 공연한 시각장애 소녀
어릴 때부터 눈 되어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
※오디오 버튼을 누르시면 기사를 음성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낭독 정은선). 이 서비스는 한국일보 홈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소정(16ㆍ서울맹학교 1)에게 엄마는 세상이다.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는 소정은, 엄마의 목소리로 사물을, 글을, 빨강의 따뜻함과 파랑의 차가움을 배웠다. “그건 뭐야?” 옆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나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는 소정에게 엄마는 지치지도 않고 표현할 수 있는 만큼의 세상을 알려줬다.
레베르 시신경 위축증. 이름도 어려운 이 병명이 소정이가 앓는 희귀질환이다. 저시력 수준인 환자들도 있다는데 소정은 사물을 구분할 수가 없다. 그가 보는 세상은 얼룩덜룩하다. 빛이 환할수록 눈은 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어릴 땐 지금보다는 나아서 빛을 차단하는 고글을 쓰면, 화이트보드에 진하고 크게 쓴 글씨는 볼 수 있었다는데. “생각하면 좀 걱정이긴 해요. 점점 눈이 안 좋아지는 걸 아니까.”
그래도 그는 빛을 본다는 걸 감사해한다. “빛이라는 존재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 커요.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있다는 것도 되게 좋고요. 태어나서 빛을 한번도 본 적 없는 선천적 전맹인 시각장애인도 있거든요.”
소녀의 담담한 말투가 나를 깨웠다. 나는, 그간 얼마나 쉽게 살았던가.
소정은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개막식에서 노래를 한 그 소녀다. 점자 블록을 따라 까맣게 암전된 메인 스타디움 가운데로 걸어가 손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해 12분간 무대에 섰다. 그때 부른 ‘내 마음속 반짝이는’의 가사는 소정의 이야기이기도 해 울림이 컸다. “보이지 않아도 그 별은 있네/ 가끔은 부딪히고 넘어지기도 해/ 하지만 툭툭 털고 여기 하나 되어…”
소정은 “몰입한 만큼 후유증도 컸던, 환상적인 경험이었다”며 “몸의 방향, 표정, 자연스러운 몸짓까지 모두 엄마가 만든 작품”이라고 떠올렸다. 엄마 김하진(49)씨는 소정의 눈이 되어 스태프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조언하며 함께 공연을 준비했다.
사람들이 언뜻 소정을 보면 시각장애인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행동이 자연스러운 것도 엄마 덕분이다. 엄마 김씨조차 “나도 어떤 땐 네가 안 보인다는 걸 깜빡 해”라고 농담을 한다.
이번 ‘삶도’ 인터뷰는 평생 자신의 눈으로 산 엄마에게 보내는 소정의 편지다. 3시간 30분 동안 소정과 나눈 대화를 그의 말투로 재구성했다. 마침 8일, 어버이날이다.
◇나의 눈이자 세상인 엄마에게
엄마!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을까? 나는 사람들이 나한테 “엄마 닮았네” 하는 소리가 듣기 좋아. 그런데 내가 진짜로 엄마를 얼마나 닮았는지 너무나 궁금해. 내게 바람이 있다면 내 가족이나 친구 같은 주변 사람들 얼굴을 딱 한번만이라도 보는 거야. 그럼 기억해놓을 수가 있잖아. 그 중에서도 나는 엄마 얼굴이 가장 보고 싶어.
엄마, 기억 나? 내가 생각나는 가장 어린 시절, 세 살 무렵인 것 같아. 엄마랑 이불 속에서 ‘불빛 찾기’ 놀이를 했던 것 말이야. 엄마가 이불을 살짝 들면, 불빛이 어느 쪽에 있는지 함께 찾아보는 놀이가 그렇게 재미있었어. 그때는 지금보다 좀 더 시력이 나았으니까, 그런 내게 조금이라도 보는 즐거움을 알게 하려는 거였겠지?
엄마는 그때부터 늘 내 옆에 있어줬지. 눈이 안 보여서 그런지 내가 어릴 때부터 질문이 많았잖아. 옆에서 누가 봉지만 만져도 “그거 뭐야?” “뭐 먹는 거야?” 물었지. 너무 궁금했거든. 엄마는 왜 이렇게 묻는 게 많으냐면서도 일일이 다 대답을 해줬지.
내게 세상을 알려준 것도 엄마야. 뭐든지 만지게 하면서 생김새를 알려주고 내가 익힐 수 있게 도왔어. 초록은 숲의 색, 하늘색은 시원한 느낌, 빨강은 뜨거운 느낌… 나는 그런 감각으로 세상을 보잖아.
엄마! 그래서 나는 ‘엄마’ 하면,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라. 어릴 때부터 내가 되게 좋아한 목소리, 엄청 부드러운 그 목소리. 엄마가 친절한 말투로 말해줄 때 엄마가 제일 예뻐 보여! 어릴 때 자기 전에 엄마가 책 읽어주는 게 좋아서 두세 권을 읽고 나서도 한 권만 더 읽어달라고 조르곤 했지. 엄마가 책 읽어줄 때의 목소리, 책장 넘기는 감촉이 정말 좋았거든. 내가 책장 넘기는 걸 하도 좋아하니까 엄마가 한 쪽을 다 읽고 나면 늘 “자, 넘겨”라고 해줬지.
점자 책은 엄청 두꺼운데 일반 책은 책장도 매끈하고 두께도 납작하니까 그 느낌이 그렇게 좋았나 봐. 점자로 된 수학책은 말이야, 일반 수학책이 한 권 분량이라면 열다섯 권쯤 되거든. 그래서 너무 힘들어. 대체 몇 권을 펴야 하는지!
엄마, 어릴 땐 지금보다 내 눈 상태가 더 나아서, 빛이 적으면 어렴풋이 사물을 분간했잖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엄마가 한글을 어떻게 가르쳐줬는지 알아? 내가 학습지의 작은 글씨는 볼 수 없으니까, 엄마가 다른 종이에 유성 매직으로 학습지 내용을 크게 쓰고 그걸 잘라서 일일이 다시 붙여줬잖아. 그 덕분에 학습지도 잠깐이나마 할 수 있었지. 엄마는 늘 내가 조금이라도 더 잘 볼 수 있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게 뭐든 무조건 다 해줬어. 초등학교 때 주위를 껌껌하게 해놓고 고글을 쓰고서 화이트 보드 위에 큼지막하게 숫자를 쓰면서 수학 문제 풀이를 했던 일도 생각 나. 얼마 없는 시력을 조금이라도 더 활용해 보려고 말이야.
◇파도가 친다는 건 어떤 모습일까
나는 사실 아주 어릴 때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잘 안 보이는 줄 알았어. 그건 엄마나 아빠가 나를 동생들과 다르지 않게 키운 덕분이란 걸 잘 알아. 그런데 어느 순간 알게 됐지. 동생들이랑 얘기를 하다 보니, 애들만큼 난 보이지 않더라고.
나는 그런 게 되게 궁금해. 자연 말이야. 내 주위에 있는 물건이나 사람들은 만져보면서 감각으로 짐작할 수가 있는데 자연은 그렇지가 못하니까. 새는 어떻게 날아 다닐까. 또 잠자리는? 눈이 오는 풍경, 하늘의 구름, 파도 치는 모습은 어떨까. 그런 자연의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걸 너무 해보고 싶어.
나한테는 밤에 길바닥 물 웅덩이 같은 데 빛이 비쳐서 반짝거리는 것도 너무 예쁘게 보이거든. 차 타고 가족 여행을 가면 내가 늘 앞자리 않기를 좋아했잖아. 그것도 반대편에서 오는 차들의 불빛을 보는 게 좋아서였어. 갑자기 앞으로 빛이 확 지나가는 게 느껴져서 재미있었거든. 폭죽놀이도 그래서 좋아한 거야. 바닷가에 놀러 갔을 때 우리가 사온 폭죽을 다 터뜨리고도 다른 사람들이 폭죽놀이 하는 걸 한 시간이나 앉아서 구경하곤 했지. 아무리 봐도 지루하지가 않았어. 나는 가로등도 허공에 떠 있는 불빛인 줄 알았지 뭐야. 기둥은 보이지 않고 빛만 느껴지니까. 보이는 사람들의 시야는, 가까이에서도 책 한 줄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 신기하던지.
그런데 지금은 어릴 때보다 더 눈이 나빠져서 좀 걱정도 되고 우울하기도 해. 레베르 시신경 위축증을 앓아도 완전히 정안(정상시력)은 아니지만 저시력 정도로 생활이 가능한 사람도 있던데. 우리 학교에도 나 같은 레베르 병증인 학생이 세 명쯤 있거든. 그런데 모두 나보다는 시력이 좋아. ‘같은 병인데도 왜 나만 이렇게 안 보이는 거야’ 하는 생각도 했지.
◇넘어지더라도 길을 포기하지 않아
그래도 엄마, 나는 안 보여도 길을 잘 찾는다! (서울맹학교) 기숙사에서 가끔 저녁 식단이 별로다 싶으면 친구들끼리 밥을 사먹으러 나가거든. 그런 때 내가 다 안내를 한다니까. 다 같이 안 보이는 애들인데 말이야. 하하. 아무래도 엄마를 닮은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면서 찾으면 되지만, 나는 보고 찾을 수 없잖아. 그러니까 인지능력이 더 좋아야 길을 잘 찾지. (안 보이는) 친구들이랑 셋이서 기차 타고 춘천도 다녀왔잖아.
나는 혼자 다니는 게 무섭지 않아. 엄마도 놀랄 정도였지? 시각장애인은 처음 가는 길은 주위의 도움 없이는 가기가 어렵거든. 그런데 도와주는 분들이 많아. 지하철을 탔을 때 눈 앞에 자리가 있어도 모르고 서 있기도 하는데 그런 때 앉혀주는 사람도 있고, 또 역에 전화를 걸어서 “제가 시각장애인이라 안내 좀 부탁해도 될까요. 몇 번째 칸에 타고 있어요” 하면 역무원의 도움도 받을 수 있어. 시도를 안 하면 그런 방법이 있다는 걸 알지도 못하잖아? 나는 그렇게 뭐든 해보는 게 재미있어!
물론 그렇게 다니다가 엄청 많이 넘어지고 부딪히기도 했지. 지하철은 그래도 멈추는 곳이 정해져 있는데, 버스는 그렇지가 않아서 많이 애를 먹었거든. 버스는 정류장에 정차해도 서는 자리가 매번 다르잖아. 보통 내가 기다리던 곳에서 몇 미터쯤 떨어져 서는데 내가 빨리 간다고 가도 보이는 사람처럼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갈 수는 없어. 그런 때 주위에서 도와준다고 나를 잡아당겨서 계단에서 넘어진 적도 숱하지. 인도와 차도 사이의 턱 때문에 고생한 일도 얼마나 많은지! 작년 가을엔 버스 계단을 오르다 크게 다쳐서 타고 나서도 엄청 많이 아팠거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겠더라고. 그래도 그런 때 나는 꾹 참아. 어떻게든 이겨내야 하니까.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넘어지는 건 그런가 보다 하는데 안 부딪힐 수 있는 상황에서 다치면 그렇게 억울하더라. 집에서 말이야. 내가 어릴 때부터 상 같은 데에 엄청 부딪혔잖아. 특히 실내용 트램펄린! 쇠로 된 트램펄린 프레임에 엄청 찧고 다녔지. 하도 많이 부딪히니까 내 정강이가 만 번은 멍들었을 거야. 한때는 그렇게 상처 입는 것에 불만이 많기도 했거든. 왜 나만 이렇게 다쳐야 하나 싶어서.
그래도 그렇게 많이 넘어지고 부딪힌 덕분인지, 이젠 혼자 길 거리를 다녀도 그렇게 무섭진 않아. 헤헤. 그런데 계단엔 아직도 공포심이 있나 봐. 가끔 계단에서 떨어지거나, 오르고 싶은데 올라가지질 않아서 휘청거리는 악몽을 꾼다니까.
◇가장 힘든 건 ‘넌 할 수 없다’는 말
진짜로 내가 힘든 건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생겼을 때야. 예를 들면, 급식만 먹다 보면 친구들이랑 고기를 먹고 싶을 때가 있거든. 그런데 고깃집에 가서 고기를 구우려면 여러 문제가 많더라고. 그래서 보이는 사람들하고 가는데 그런 때 나는 물어봐. “이거 제가 할 수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어렵지만 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면 희망이 있는데, 위험해서 못할 것 같다고 하면 슬픈 생각이 들어.
난 절망이 가장 싫거든. 할 수 없다는 건 가능성이 없다는 얘기잖아. ‘어렵다’는 말엔 절망하지 않아. 그런데 ‘할 수 없다’는 말에는 절망감이 들어. 자립심 강한 성격이라서 나는 누가 내 대신 해주는 것보다, 도움을 받아서라도 직접 해야 진정으로 내가 한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요즘에 식당이나 패스트푸드점에 늘어난 무인주문시스템만 해도 그래. 그런 시스템은 모두 터치스크린 방식이거든. 보이지 않는 사람은 주문조차 할 수가 없는 거야. 엘리베이터도 버튼식이 아니라 터치식이 생겨나고. 터치식 엘리베이터를 시각장애인들이 어떻게 누르겠어. 전기 자동차도 걱정이야. 가까이 와도 소리가 잘 안 나니까 빨리 피할 수가 없거든. 그런 걸 생각하면 좀 막막해져. 앞으로도 그렇게 세상이 바뀌어가면 어떻게 혼자서 살아가지? 눈이 보이는 사람이 언제나 내 옆에 있을 순 없는 거잖아. 매번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엄마, 내가 초등학교 때 엄마한테 계단 때문에 짜증을 부렸던 것 기억나? 언젠가부터 엄마가 계단이 나타나도 말을 안 해주더라고. 엄마를 잡고 걸으니까 넘어지진 않더라도 갑자기 발이 툭 떨어지니까 얼마나 무서워.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내가 화가 나서 엄마한테 “내가 안 보이는 거 알면서 왜 계단이라고 미리 말을 안 해주는 거야”라고 했지. 그랬더니 엄마가 그랬어. “엄마가 말을 안 해도 옆에서 엄마가 걷는 느낌으로 ‘계단이구나’ 알아챌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키려고 그런 거야. 그래야 시각장애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과 다닐 때 일일이 그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다치지 않고 다닐 수 있게 되지.” 그때 엄마가 그러는 데엔 다 이유가 있구나, 엄마의 마음은 내가 다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깊구나 싶어서 감동 받았어. 그리고 엄마한테 많이 미안했지. 나는 엄마가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한다는 걸 알아.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엄마는 늘 나를 위했어. 그 덕분에 지금은 엄마와 걸어갈 때 계단이 나타나도 곧잘 다니지. 가끔씩 정신 안 차리다가 계단에서 떨어지기도 하지만. 하하.
◇계속 이어진 ‘노래할 기회’
엄마, 생각해보면 그래도 나는 감사한 게 참 많아. 빛은 알잖아. 빛을 볼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너무나 크니까. 빛이라는 존재를 아예 모르는 시각장애인도 있잖아. 태어날 때부터 눈이 안 보인 것도 다행이다 싶어. 보이다가 보이지 않게 됐다면, 더 무섭고 절망하고 적응하지 못했을 것 같거든.
그리고 노래! 내겐 노래가 있잖아. 커서 뭐가 되고 싶냐고 물으면 정말 잘 모르겠는데, 뭘 하고 싶냐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노래야. 무슨 일을 하든 노래는 하고 있을 것 같아.
그것도 어릴 때 엄마가 피아노 치면서 노래를 많이 불러준 덕분일까. 엄마랑 함께 화음 넣어서 동요나 찬양을 부르는 게 정말 좋았어. 엄마가 음감이 정말 뛰어나잖아! 엄마를 닮아서 나도 좋은 음감을 타고난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해. 차 타고 어딜 가도 내내 노래를 부르면서 갔잖아. 다섯 살 때 찬양 앨범 녹음에 참여한 걸 시작으로 노래는 늘 나와 함께 했네. 열두 살 땐 재능 기부로 (고려대 구로병원 병원학교가 희귀난치병을 앓거나 장애가 있는 어린이를 위해 제작한) ‘아름다운 세상’ 음반 메인 보컬도 맡았고.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 무대에서 노래 부를 수 있는 기회도 그래서 내게 온 것 같아.
그렇게 노래 부를 때가 제일 재미있고 좋았는데 실은 요즘 좀 힘들어. 방향을 많이 잃어버린 기분이거든. 중학교에 올라간 뒤부터인 것 같아. 초등학교 때는 예쁜 소리가 나왔고 고음도 내지르면 잘 올라갔는데, 지금은 아니거든. 내가 내고 싶은 소리가 달라지기도 했고 말이야. 이젠 동요가 아니라 팝의 느낌을 내고 싶거든. 그런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까 답답해.
그래서 ‘아, 이제 노래 그만하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 그런데 그럴 때마다 자꾸 기회가 생기는 거야. 노래를 부를 기회, 더 잘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는 무대 말이야. 그래서 올해 초엔 ‘불후의 명곡’까지 나가게 됐고. 그 기회들이 내가 노래를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어. 신기하지?
노래를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다고 한 것도 그래서야. 1년쯤 전부터 (한국장애인재단의 지원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보컬 레슨을 받고 있잖아. 아직은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레슨 가는 날이 제일 좋아! 아직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내가 다른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하거든. 그렇게 노래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물론 클라이맥스에서 힘 있는 소리를 내야 하는데 아직 잘 되진 않아. 발성을 완전히 바꿔야 하는데 지금은 초기니까 소리를 마구 낼 수밖에 없기도 하고. 그걸 옆에서 듣고 있으면 내 소리가 더 망가진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아. 어떤 땐 엄마가 나보다 더 초조해하는 것 같아서 눈치가 보이기도 해.
그래도 엄마, 언제쯤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을지 나도 모르지만 한번 해보려고 해.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나는 지금까지 포기를 모르고 살았잖아. 눈이 보이지 않아도 방과후 수업으로 피아노와 플룻도 배웠어. 플룻은 배운 지 2개월 만에 학생 오케스트라에 들어갈 수준이 됐었지! 1년 넘게 배운 친구보다 잘해서 걔가 나를 엄청나게 질투하기도 했었다구. 플룻이 보기보다 소리를 내기가 어렵거든. 처음엔 나도 호흡이 짧아서 불기만 하면 어지럽고 손발이 저렸지만,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악기라서 포기하지 않고 연습을 해서 실력이 늘었지. 누가 ‘이거 해야 해, 안 하면 안 돼’ 해도 내가 납득이 안 되면 안 하는 게 나잖아. 다른 사람 말 때문이 아니라, 내 스스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해내는 게 나잖아.
◇돈을 많이 벌고 싶어, 나눌 수 있게
엄마, 요즘 코로나19 때문에 온라인수업을 하니까 학교 기숙사가 아니라 집에 있잖아. 그런데도 엄마랑 예전처럼 말도 많이 안하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깐 좀 서운하지? 지금이 또래랑 노는 게 더 재미있고 비밀도 생기는 나이잖아! 사춘기인 건가?
그래도 나는 엄마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가 없어. 얼마 전 엄마와 아빠가 헤어질 때도 난 엄마와 함께 살게 해달라고 했잖아. 엄마가 맏이인 나한테는 그간의 사정을 미리 말해줘서 짐작을 했는데도 조금은 걱정이 됐나 봐. 엄마가 그때 나한테 그랬지. “엄마는 어떤 일이 있어도 널 버리지 않아. 항상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엄마와 아빠의 다툼이 오래됐으니까, 이럴 거면 차라리 이혼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아빠나 동생들과 떨어져 사니까 좀 우울했던 것도 사실이야. 친구랑 통화하다가도 아주 사소한 가족들 얘기에 부러워지더라고. 가족이 나뉘어 산다는 것, 동생들은 엄마의 따뜻한 밥을 먹지 못한다는 것 그런 걸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고 동생들에게 미안하기도 해. 그렇다고 엄마랑 사는 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고…
엄마! 요즘은 살짝 멀어졌지만, 역시나 엄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야. 엄마를 생각하면, 엄마는 그냥 나인 것 같아. 엄마 자신보다 나를 더 생각하는 엄마를 보면 엄마의 사랑은 정말 끝이 없구나 하는 게 느껴져.
엄마, 나는 엄마를 닮은 어른이 되고 싶어. 엄마는 일도 똑 부러지게 하고, 옷 고르는 센스도 훌륭하고, 요리도 잘 하잖아. 그 모든 걸 엄마한테 배우고 싶은데 보이지 않으니까...
난 나중에 해보고 싶은 일도 많아! 미디 프로그램(디지털 작곡 프로그램)을 배워서 음악 작업도 해보고 싶고, (지금 운영 중인 채널 ‘SingHope소정’) 유튜브 계정에 노래 커버 영상도 만들어서 올려보고 싶어. 장애인의 일상을 영상으로 찍어서 (비장애인의) 인식 개선을 돕는 역할도 할 거야. 아! 그리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내가 후원을 받아서 보컬 레슨을 받았듯,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받은 걸 나누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내가 누린 행복을 다른 사람도 느끼도록 말이야.
엄마! 내가 속으로만 생각하고 표현을 잘 않지만 그거 알아? 가끔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도 항상 그 자리에서 같은 마음으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엄마가 있어서 정말 감사해.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엄마와 행복한 추억 만들면서 살면 좋겠어. 그리고 엄마가 이제까지보다 더 많이 웃으면서 살기를 바라. 많이 사랑해!
◇가장 닮고 싶은 사람, 엄마
소정은 “이 정도면 행복한 삶”이라고 말했다. “오늘은 행복한 일이 뭐가 있었냐”고 물으니, “마카롱을 먹었어요!”라고 답했다. 인터뷰할 때 출출할 걸 대비해 간식으로 마카롱을 준비해뒀던 터였다. 마카롱을 앞에 밀어주자, 소정은 더듬더듬 손으로 짚어 하나를 쥐더니 마카롱의 향부터 맡았다. 한 입 베어 문 표정이 세상을 가진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도 행복하고요, 하하하!”
행복을 느낄 줄 알아서 행복을 소유한 소정에게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를 물었다.
“저는 뭔가를 할 때 항상 희망, 희망을 가지려고 노력해요. 안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늘 희망을 잡으려고 하죠. 그 다음엔 사랑이요. 사랑을 지키면서 살고 싶어요. 사랑이 있어야 따뜻한 세상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소정의 말에서 부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닌 절대적인 행복을 깨닫게 되길 바란다. 볼 수 있는 자가 볼 수 없는 자를 통해 느끼는 좁은 행복이 아니라, 내가 나여서 누리는 충만한 행복 말이다. 열여섯 소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러니까 행복의 교과서였다.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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