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기억하는가. 잊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자꾸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떠올리려면 집중을 해야 한다. 숨소리를 낮추고 몸의 모든 동작을 멈추며 시선도 한곳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눈을 감고 숨조차도 참을 수 있는 한도까지 참아야 한다. 그러면 들린다. 말투와 잘 쓰는 단어와, 나의 불안을 만져주던 따뜻한 숨소리. 그리고 가장 생생해서 떠올릴 때마다 울게 하는 말, 미안함과 고마움과 안쓰러움까지 쟁여 넣은 그 말, 사랑해... 까지도.
어머니 목소리다. 사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목소리! 그 목소리가 자꾸 멀어져 간다. 모습이 잊힐 것만 겁냈었는데 녹고 있는 눈사람처럼 작아지고 사라지는 목소리. 생각지도 못한 이별이 또 하나 보태진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병석에 계셨던 십육 년 동안, 생과 사를 가르는 이별은 언제든 우리 모녀에게 들이닥칠 수 있는 통보된 시간이었다. 의사는 지치지도 않고 십육 년을 ‘준비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처음엔 절대 그럴 리 없다며 억지를 부렸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내가 안 보내겠다는데 누가, 무슨 자격으로 내 엄마를 데려갈 수 있냐며 의사 앞에서 소리도 질렀다. 그러다가 몇 차례나 중환자실을 오가고 가슴에 인공심장박동기를 넣는 시술을 거듭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세상에서 가장 공손한 환자 보호자가 되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바로 눈앞에서 똬리를 튼 세상이 어떤 것인지 그렇게 나는 보았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온몸이 눈이 되어 어머니의 그림자까지도 샅샅이 담았다. 오늘, 지금 보고 있는 저 모습이 세상에서 내가 보는 어머니 마지막 모습이면 어쩌나 하는 상상은 불길했지만 거둬지지 않았다. 때문에 볼 때마다 나로선 절박한 상봉이었다. 병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순간에 백이면 백 번 다시 들어가 어머니 침대 곁을 돌며 서성인 것도 그래서였다. 어머니 얼굴을 만지고 손을 만지면서 나는 초능력의 힘으로 내 기억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어머니의 살갗 감촉을 저장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 이마의 파리한 실핏줄까지도 기억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정상 체온보다 늘 일이 도쯤 낮아 내 걱정의 온도를 높이던 어머니의 삼십오 도 언저리의 체온도, 지금 안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어머니를 걱정해 병문안 왔던 사람들이 돌아갈 땐 외려 자신들이 위로받고 간다며 두고두고 말하던 어머니의 무구한 미소도 그대로 그릴 수 있다. 평생 무슨 경건한 의식인 양 바싹 깎아댔던 손톱과 발톱도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하다. 내가 어머니에게 이 생에서 마지막 해드린 것도 돌아가시기 사흘 전 어머니의 손발톱을 깎아드린 일이었다. 대부분의 그 연세 어른들처럼 무좀으로 갈라지거나 회색빛으로 두꺼워지지 않고, 아기처럼 고운 분홍 빛깔의 얇고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발톱. 나는 그것이 좋으면서도 슬펐다. 나중에 어머니 세상 떠나시면 어느 한 군데 그립지 않을 곳이 없을 테지만, 나는 빨간 속살까지 보이도록 정갈하게 깎인 이 손톱이 그리워서도 많이 울겠구나... 그날도 그런 생각에 뜨거운 숨이 목으로 자꾸 넘어갔다.
세상엔 힘든 일도 많고 외로울 수 있는 상황도 열 사람이면 열 개일 만큼 다양할 것이다. 어머니가 쓰러지고 나는 외로움의 극한까지 끌려갔다. 나는 무남독녀였다. 이건 슬픔이든 걱정이든 함께하거나 나눌 혈육 하나 없이, 오로지 내 슬픔이요 내 걱정이라는 걸 뜻한다. 나는 투사가 되었다. 아니 되어야 했다. 울어서도 안 되고 불안과 무서움을 들켜서도 안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보고 있는 거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사실은 아픈 어머니가 십육 년 내내 진짜 투사였음을! 그것이 얼마나 큰 어머니의 사랑이었는지를!
어머니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병든 자신에 대한 비관이나 억울함, 한숨과 울음 한 번 나는 본 적이 없다. 돌아가실 때까지 명료한 정신을 갖고 계셨던 어머니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병실 창가에 자리했던 침대에서 창을 통해 계절을 보고 세월을 쌓아오던 어머니. 어머니가 느꼈을 외로움과 막막함과 두려움. 거기에 그 어떤 것보다도 어머니를 많이 괴롭혔을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나에 대한 온갖 감정의 두께.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를 더 뜨겁게 울게 했던 건 그렇게 투사였던 어머니의 십육 년이 불쌍해서였다. 미안해서였다. 덕분에 내가 덜 힘들었음이 고마워서였다.
어버이날이 코앞이다. 나는 네 번째 가슴에 달아줄 수 없는 꽃을 산다. 이 꽃은 어머니가 계신 봉안당 유리창에 또 일 년 동안 꽂혀 있을 것이다. 갈 때마다 교환해서 붙여놓고 오는 손편지는 어머니께 들려드리는 내 목소리다. ‘엄마’ 하고 열 번을 부르면 ‘우리 딸, 사랑해’로 열 번을 대답해주던 어머니의 목소리! 그 짧은 여섯 음절 목소리가 자꾸 멀어지는 게 슬프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들어라. 모습은 사진으로라도 볼 수 있지만, 목소리는 떠나면 멀어지는 기적(汽笛) 같은 거더라.
서석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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