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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영토분쟁] <69> 미완의 조약ㆍ100년 분쟁 ‘아루나찰프라데시’

입력
2020.05.16 08:00
수정
2020.05.16 09:29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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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루나찰프라데시.
아루나찰프라데시.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의 고향. 주민 대부분은 중국티베트어족이지만 인도의 행정력이 미치는 곳. 100여년 전 맺은 ‘미완의 조약’이 지금껏 분쟁의 불씨로 남아 있는 곳. 인도 동북쪽 끝 아루나찰프라데시주(州) 얘기다.

1912년 청나라 멸망과 함께 독립의 꿈을 키웠던 티베트의 굴곡진 운명은 1914년 3월 북인도 심라에서 시작됐다. 국경선 획정을 위한 영국ㆍ중국(당시 중화민국)ㆍ티베트 간 3자회의에서 티베트는 언어와 문화권 전체를 기준으로 제안했지만 중국이 강력 반대했다. 그러자 영국령 인도 식민정부 외교장관이던 헨리 맥마흔이 “몽골처럼 티베트 문화권을 내외장(內外藏)으로 구분해 내장 지역은 중국에 권리를 부여하되 외장 지역은 티베트 자치를 인정하자”고 제안했다.

맥마흔은 부탄의 동쪽 국경선과 아삼계곡 쪽으로 흐르는 브라마푸트라강이 크게 휘는 지점을 잇는 885㎞ 길이의 이른바 ‘맥마흔 라인’을 그으면서 히말라야산맥 남쪽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을 영국령 인도에 편입시켰다. 독립을 위해 영국의 지원이 필요했던 티베트는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중국은 티베트가 독립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영국ㆍ티베트 간 합의를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전격 침공해 합병한 1950년 당시만 해도 중국과 인도는 제3세계 비동맹주의를 기치로 긴밀히 협력했다. 하지만 1959년 티베트 내 대규모 반중 시위가 실패하고 달라이 라마가 인도로 망명하면서 양국 관계가 틀어졌다. 중국은 인도가 달라이라마의 피신을 도왔다고 의심하며 국경선 재설정 카드를 꺼냈다.

정치ㆍ외교적 공방은 1962년 이 지역을 실효지배하던 인도의 군사초소 설치 직후 국지전으로 비화했다. 당시엔 중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1993년 국경 평화협정 체결 때까지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계속됐다. 그 결과 이 지역을 둘러싼 양국 간 힘겨루기는 국가적 자존심 문제가 됐다. 현재까지도 국경선은 획정되지 않았고 실질통제선(LAC)이 영토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모두 국제사회 내 역할론을 중시하는 만큼 양국 간 충돌 가능성은 상수나 다름없다. 2017년 중국ㆍ인도ㆍ부탄 3국 접경지 도클람에서의 군사 대치, 2018년 12월 중국인 건설노동자들의 LAC 무단 월경, 2019년 2월 모디 총리의 깜짝 방문 등 최근 몇 년 새에도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치달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게다가 중국에겐 티베트 인권문제가 아킬레스건 중 하나이고, 인도는 미국의 대중 포위구상인 인도태평양전략의 한 축이 됐다. 아루나찰프라데시 지역이 ‘시한폭탄’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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