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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베를린서 묻다] 서독 좌ㆍ우파 “동독 봉쇄하면 허리띠 더 졸라매 … 경제파탄 붕괴론은 환상”

입력
2020.05.18 04:4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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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2>진보와 보수의 평화정치 합의

1970년 3월19일 역사상 처음 열린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 에어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한 빌리 브란트(왼쪽) 서독 총리를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영접하고 있다. 통상적인 의전 행사는 없었지만, 역사 주변으로 몰려든 2,000여명의 동독 시민들은 “빌리”를 연호하며 환영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70년 3월19일 역사상 처음 열린 동서독 정상회담을 위해 동독 에어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한 빌리 브란트(왼쪽) 서독 총리를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영접하고 있다. 통상적인 의전 행사는 없었지만, 역사 주변으로 몰려든 2,000여명의 동독 시민들은 “빌리”를 연호하며 환영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92년 8월 28일 독일의 ‘통일수상’ 헬무트 콜은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던 빌리 브란트 전 수상의 자택을 방문했다. 동방정책을 통해 독일통일과 유럽평화의 초석을 놓은 공로로 1971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민당의 위대한 지도자 브란트였지만, 오랜 병마에 시달려 자리에서 일어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는 최고의 예를 갖추어 정장을 차려 입고 거실 의자에 앉아 나볏이 콜 수상을 맞았다. 콜은 안쓰러워 “몸이 힘드신데 왜 일어나 앉으셨냐”며 말하자 브란트는 “나의 총리가 오시는데 어떻게 침대에 누워 있겠냐”고 화답했다.

두 사람은 1970년대 중반부터 우파 정당인 기민련과 좌파 정당인 사민당의 당수로 만나 격렬한 정치 대결을 벌였다. 정치 신조의 차이, 정책 논쟁의 와중에도 콜에게 브란트라는 사람은 정치적 권위가 있으면서도 항상 “공손한 사람”이었다. 1989~90년 통일 국면에서도 브란트는 다른 사민당 지도자들과 달리 콜의 통일정책 지지자였고, 콜은 브란트의 충고에 항상 귀를 열었다. 1990년 10월 3일 베를린의 제국의회 의사당 앞에서 독일통일이 선포되던 순간, 콜과 브란트는 독일 국민 앞에 당당히 통일의 주역으로 나란히 설 수 있었다.

콜이 병문안을 다녀가고 얼마 뒤, 1992년 10월 8일 빌리 브란트는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를 알린 건 사민당이 아니라 총리실이었다. 사민당 지도부는 난감했다. 브란트는 부고와 장례의식과 관련된 모든 것을 콜이 자신을 방문한 날 상의해버린 것이다. 콜은 브란트의 희망과 요구대로 충실히 그의 마지막 길을 마련해주었다. 그 후 콜은 자서전에서 기민련 소속의 오랜 정치 동지들은 냉혹하게 평가했지만, 브란트에게 만큼은 시종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한국일보 자료사진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데올로기로 물든 20세기에 좌우로 대립한 정치지도자들 사이에서 우애와 존중은 흔치 않았다. 브란트와 콜이 가능했던 건 ‘평화정치’ 덕분이다. 평화는 여러 방향이다. 평화는 왼쪽에서도 오른쪽에서도 다 올 수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전반기 사민당 당수였던 브란트가 토대를 닦은 동방정책이 1980년대 우파 정당의 총리였던 콜 정부 시기에 수미일관하게 지속되었고 증폭되었다. 독일통일의 비밀 중 하나는 평화정치에 대한 서독의 진보와 보수간 정치적 합의와 연속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이명박ㆍ박근혜 정부가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대북 포용정책을 포기하고 대결정책을 재가동한 것은 단순한 시간 지체나 일시적 혼란이 아니라 상호신뢰와 예측가능성에 기초해야 할 평화정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다. 한번 허물어진 신뢰의 근간을 다시 세우는 일은 처음 협정을 맺는 일보다 더 어렵다. 한 공동체 내부의 정치적 합의와 공유가 더 중요해졌다.

한국의 보수와 마찬가지로 서독의 우파도 애초 좌파가 이끈 평화정치를 수용하지 못했다. 그들 또한 전투적 반공주의에 빠져 민주주의와 평화의 관점에서 공산주의자들을 길들이는 법을 익히지 못했다. 특히 1961년 8월 동독 정권이 세운 베를린 장벽은 공산주의의 폐쇄성과 억압을 대변하며 줄곧 동독 주민들의 불만과 국제적 규탄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상황은 녹록하지 않았다. 서독의 우파는 반공주의 전선에서 동독을 규탄하고 고립시키는 정책을 포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서베를린 시장으로 베를린 장벽에 온 몸으로 맞섰던 빌리 브란트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줬다. 그는 “공산주의 정권은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어야” 하며, “현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현상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언론과 종교, 학계 및 정치권에서 유사한 평화 구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내용은 백화쟁명이었지만 전제는 한결같았다. 반공주의에 기초한 대결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긴박해 어정쩡해서는 안되었다.

1971년 12월 10일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브란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1971년 12월 10일 오슬로에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브란트.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특히 브란트는 1963년부터 ‘접근을 통한 변화’를 주장하며 공산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구체적 고통과 물질적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체제의 권력자와 대화하고 협상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브란트와 그를 보좌해 공보관을 맡고 있던 바르는 공산주의 극복은 위협이나 압박을 통해서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들과 대화하고 협력(‘접근’)함으로써 그 체제가 스스로 변하도록(‘변화’) 유도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 때 그들은 대화를 한다면서 동시에 상대 정권의 붕괴를 함께 도모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바르는 ‘접근을 통한 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제적 곤경이 정권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일종의 환상이다. 그 지역의 사람들이 던진 선의의 충고, ‘무역을 중단해라, 그러면 우리는 허리띠를 더 졸라맬 것이다’는 말은 유감스럽게도 어떤 길도 없음을 보여 준다. 게다가 우리는 경험을 통해 긴장의 증대가 오히려 울브리히트(당시 동독 공산주의 지배자)의 입지를 강화하고 분단을 더 심화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요컨대, 평화는 상대 체제의 직접적 붕괴를 노리거나 염두에 두는 모든 전략과의 완전한 단절을 전제하는 것이다.

1969년 총리가 된 브란트는 “거창하게 뭔가를 얘기하기 보다 작은 일이라도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핵심은 통일 논의를 유보하며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며 협력과 교류를 증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구체적 고통을 해결”하고 “지금 당장 해결 가능한 일에 집중”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동방정치가들은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실용적’이라는 말을 입에 달았다. 인도적 문제의 해결에 집중하는 것을 브란트는 ‘작은 걸음의 정책’이라고 불렀다. 그 결과 1972년 12월 동서독 간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그것은 향후 동서독 관계의 정상화와 협력관계에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동서독간 ‘기본조약’은 국제법상 조약으로서 “동서독 중 어느 한 국가도 다른 국가를 대표할 수 없”음을 선언하며 국가로서 상호 승인했고 유엔 동시 가입과 상주대표부 설치를 그 핵심 내용으로 담았다. 본 조약 외에 통행규제 완화, 이산가족 상봉과 재결합, 우편물 교환 확대 등을 포함하는 각서도 교환, 본격적인 협력의 장을 열었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헬무트 콜 전 총리는 우파 정당 소속이었으나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 통일 독일의 수장이 됐다.한국일보 자료사진
‘독일 통일의 아버지’로 불리는 헬무트 콜 전 총리는 우파 정당 소속이었으나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계승, 통일 독일의 수장이 됐다.한국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 초반 사민당 주도의 동방정책에 맞서 야당이었던 우파 기민련은 1972년 4월 말 브란트 총리 불신임안을 제출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11월 총선에서 사민당은 45.9%의 지지를 얻어 국민의 지지를 얻었다. 이제 변해야 할 것은 동방정책이 아니라 보수 우파의 동독 정책이었다. 게다가 사민당 지도부는 기민련 지도자들을 동방정책으로 견인하기 위해 여러 정치적 지혜를 발휘했다. 헬무트 콜 주변 인물들이 동독을 방문토록 유도하고 동서독 정부 간 대화 외에도 보수 야당이 동독과 독자적인 대화 채널을 만들도록 유도했다. 사민당 지도부는 기민련 내부에 “자유주의적 진보주의자” 블록이 형성되도록 보조했다. 그 결과 1977년 당대회를 기점으로 기민련도 사민당의 동방정책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1982년 10월 권력을 넘겨받은 콜 정부는 곧장 사민당 정부의 동방정책을 계승한다고 선언했으며 실제로는 사민당 정부보다 동독에 더 많은 양보와 지원을 제공했다. 게다가 콜 수상은 자신의 경쟁자이자 동방정책 반대자였던 바이에른주 장관 프란츠 요셉 슈트라우스에게 동독에 대한 경제적 지원 사업에 독자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1983년과 1984년 콜의 양해와 지지, 슈트라우스의 직접 주선을 통해 서독은 동독에게 어떤 반대 급부도 없이 10억마르크 씩 차관을 제공했다. 콜은 이런 방식으로 당내 우파세력의 반발을 무력화하고 통합하는 정치력을 발휘했다.

진보와 보수 세력이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서 합의하기는 늘 어렵다. 하지만 평화정치에 대해서는 소통과 합의의 여지가 크다. 보수 우파들의 선의와 이성에 기대기는 어렵지만, 그럼에도 평화정치가들은 평화무도장에 뿔 달린 이들을 계속 초대해야 한다.

기괴한 공산주의자든 전투적 반공주의자든 그가 평화를 교란하는 악마라면, 그 악마들과 쉬지 않고 춤추는 외길만 남아 있다. 춤에 익숙하지 못한 상대가 발을 밟더라도 온 몸으로 리듬과 규칙을 계속 전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반도에서는 ‘콜’ 없이 ‘브란트’들만으로 평화를 열어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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