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감학원ㆍ삼청교육대 피해 생존자 한일영씨 인터뷰
“너무 오래 희망고문… 과거사법 ‘배상’ 삭제 아쉬워”
“언젠간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너무 오랫동안 버텼습니다. 말 그대로 희망고문이었어요. 이번에도 처리가 안 됐다면 정말 낙담했을 겁니다.”
20일 국회 본회의에서 천신만고 끝에 처리된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과 관련해 한일영(62)씨는 이렇게 말했다. 한씨는 박정희 정권 시절 ‘아동 강제수용소’였던 선감학원(본보 2월 29일 자 1ㆍ12면)에, 전두환 정권 땐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힌 피해 생존자다. 끔찍한 국가 폭력에 두 차례나 시달렸던 그를 지난 18일 대전 자택에서 만났다.
한씨의 삶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0년. 경기 가평에 살던 12세 소년은 서울 성북구의 작은아버지 댁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용돈을 받을 것이라는 꿈에 부푼 것도 잠시, 서울에 도착하니 경찰에 의해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끌려 갔다. 10개월 후쯤 ‘집에 보내 주려나 보다’라는 생각에 경기도 배차 차량을 탔으나, 엉뚱하게도 그가 내린 곳은 경기 안산의 작은 섬에 있는 선감학원이었다. 구타와 굶주림, 노동 착취가 일상화된 생지옥이었다. “이거 하나는 꼭 알고 싶어요. 대체 왜 어린 아이들을 속이면서까지 선감학원으로 보냈는지 말입니다.”
4년 후 한씨는 바다를 건너 선감학원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프레스, 선반 짜기 등의 기술을 배우며 새 삶도 시작했다. 하지만 1980년 여름, 또다시 악몽이 시작됐다. 동네 아이들을 데리고 보호자 격으로 서울 뚝섬 수영장에 놀러 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경찰에 붙들렸고, 결국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것이다. 온갖 가혹 행위를 당했던 4주간의 ‘순화교육’이 끝난 뒤엔 ‘근로봉사대’로 넘겨졌다. 강제노역 도중 탈출했으나, 당일 밤 헌병대에 체포된 그는 계엄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의 수감 생활을 했고, 1981년 12월 만기 출소했다.
악명 높은 삼청교육대 출신에다 감옥살이 이력까지 더해진 한씨에게 사회는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경찰에서 요시찰 대상으로 분류되는 바람에 취업을 해도 회사에 담당 경찰이 찾아 왔어요. 얼마 안 가 쫓겨나는 일이 반복됐죠.” 예순이 넘은 지금까지 ‘정상적인’ 직장 생활을 했던 기간은 2년 정도에 불과했다. 한씨는 “선감학원에서 배움의 기회를 빼앗겼고, 삼청교육대를 나와선 취업의 길마저 막혔다. 하루하루 먹고 사느라 학업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꿨던 게 평생의 한”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국가 폭력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한씨의 삶은 이제 치유의 순간을 맞으려 하고 있다. 계엄법 위반 사건과 관련해선 지난 12일 서울중앙지법에서 40년 만에 재심 무죄 선고를 받았다. 과거사법 개정안 통과로 ‘2기 진실화해위’가 꾸려지면 선감학원 사건의 진상 규명 조사도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한씨는 “무엇보다 진상이 밝혀져 명예가 회복되길 바란다”며 “아내의 말처럼 부끄러워할 건 국가인 만큼, 나는 당당해지려고 한다”고 했다.
다만 과거사법 개정안에서 ‘정부의 배ㆍ보상 책임’ 조항이 막판에 빠진 데 대해 한씨는 아쉬움을 표했다. “빈말이라도 국가가 위로와 함께 ‘피해를 배상하겠다’고 약속했어야 합니다. 특히 미래통합당이 해당 조항 삭제를 요구하며 끝까지 트집을 잡은 건 납득할 수 없습니다.” 국가 폭력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갈 때,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할 세력이 진정한 결자해지의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는 일침이었다.
대전=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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