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전원합의체 유죄 확정… 정치공세 가깝고 뒤집기 어려워
한만호 비망록은 1심부터 대법원까지 이미 채택됐던 증거
검찰의 강압수사가 있었다는 내용이 담긴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비망록’이 다시 주목받으며, 여당이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의 재조사 카드를 꺼내들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가 출범하면 당시 수사팀을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정도 근거로는 대법원 확정 판결까지 난 사건을 ‘뒤집기’하기 어렵고, 이런 주장이 나온 배경 자체가 정치적 공세에 가깝다는 법조계의 평가가 대체적이다.
2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이 심리에 참여하는 합의체)에서 유죄로 확정한 이 사건을 재심에 부치기에는 아직 근거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형사소송법은 △증거 위ㆍ변조 △허위 증언·감정·통역·번역 △무고 등이 다른 사건의 확정판결로 증명된 때 등으로 재심 사유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새로운 증거가 발견됐다면 무죄 또는 면소를 인정할 만큼 명백한 수준이어야 한다.
문제의 비망록은 한 전 총리의 불법 정치자금 사건(한명숙 2차사건) 재판 1심부터 제출돼 대법원까지 채택된 증거다. 이 비망록은 피고인이 아니라 검찰이 확보해 제출한 증거로, 당시 검찰은 한 전 대표가 법정에서 허위 진술을 하고 있다는 근거로 이 비망록을 제시했다. 당시 재판 과정을 살펴보면 검찰이 낸 증거였기 때문에 재판에선 강압 수사 의혹은 쟁점이 되지도 않았다. 당시 1심은 한씨의 검찰 진술을 믿을 수 없다며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지만, 2심과 대법원은 한 전 대표의 진술뿐 아니라 채권회수목록, 한 전 총리 동생이 받은 수표 등의 물증까지 고려해 유죄를 인정했다.
재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수사팀이 한씨를 회유 또는 협박해서 진술을 받아낸 혐의로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는다면 재심을 받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전 대표가 2018년 출소 직후 숨졌기 때문에 비망록에 담긴 주장을 뒷받침할 신빙성 있는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출범한 검찰 과거사위원회에서 재조사나 재심이 거론되지 않은 점도 여권 입장에서는 불리한 사정이다. 김한규 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은 “오래 전부터 현재 여당이 잘못된 수사라 문제 삼았다면, 현 정권의 과거사위원회가 다룬 사건들의 재조명과 함께 했어야 했다”며 “이번에 이 사건만 따로 다시 재조사하는 것은 정치적 오해를 받을 것”이라 말했다.
여권 일각에서는 공수처 출범 후 재조사하는 방안도 거론 중이지만, 이마저도 정치적 논란으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 강압수사 의혹이 제기된 당시 수사팀을 공수처 수사 대상으로 삼아 사건을 다시 살펴보자는 논리인데, 법조계에서는 공수처 출범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 지역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당시 모든 대법관들이 살핀 증거로 확정된 사안을 가지고 집권 여당이 공수처 수사를 거론하는 것은 총선 압승에 따른 자신감으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전날 국회에서 “정밀 조사가 필요하다”고 밝힌 만큼 실제 강압이 있었는지를 살피는 법무부 차원의 진상조사는 가능하다는 의견이 있다. 한 변호사는 “법무부 진상조사단 정도가 큰 논란 없이 가능한 마지노선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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