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은 ‘급진 좌파’임을 자임한다. 때문에 그가 주로 겨냥하는 건 온건 좌파다. 이미 기존 국제 질서인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희망을 잃었다. 그 결과 인류는 존망의 기로에 섰다. 그런데도 좌파인 척 진보연(然)하는 위선자들이 절망적 현실을 호도하며 세계를 오도하고 있다는 게 지젝의 분석이다.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 등 전작들에서 진정한 혁명의 필요성을 호소해온 그의 전망이 신작 ‘용기의 정치학’에서는 더 어두워졌다. 원저 ‘희망을 거부하는 용기’(The Courage of Hopelessness)가 발간된 2017년은 30년간의 전후(戰後) 체제를 포퓰리즘이 뿌리째 흔들던 시기였다. 극우 포퓰리즘과 인종주의, 파시즘의 부상, 기존 강국과 신흥 강국 간의 지정학적 긴장, 테러리즘의 득세, 성(性)정치와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이 발생시키는 시민 간 분열 등, 책은 암울한 징후들로 가득하다.
지젝이 보기에 현재 시스템이 유지되는 이상 대안은 없다. “진정한 용기는 대안을 상상하는 게 아니라, 분명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게 지젝의 조언이다. “변화는 절망에 지쳐 더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책의 1부는 ‘절망할 수 있는 용기’다.
지젝 말대로 한때 불가능했던 게 가능해지고 있다. 기후 재난이 대표적이다. 우파 포퓰리즘의 선동은 기만이다. 가령 “‘이민자의 위협에 깨어나라’고 촉구하지만 그건 계속 ‘꿈을 꾸라’는 말”이다. “세계 자본주의를 횡단하는 적대감을 무시하라”는 뜻이다. 생태 재앙이 자본주의를 약화하기는커녕, 강화하리라는 게 지젝 비관이다.
하지만 좌파는? 미국의 진보 진영을 지젝은 신랄하게 꾸짖는다. “최근까지 이들은 지구 온난화 우려를 공산주의자들의 종말론적 공포로 일축하거나, 극단적 생각에 근거해 성급한 결론을 내릴 명백한 증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상을 지속하면 된다고 믿었다.” “오랫동안 미국이 세계 경찰 노릇을 한다며 비난해 온 좌파가 트럼프 대통령 집권 뒤 미국이 민주주의 기준을 전 세계적으로 실행하던 과거를 그리워하게 됐다”며 “트럼프 취임 연설이 흥미로운 건 일관성 없는 좌파의 모순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한다.
트럼프를 이기려면 ‘우리는 자본주의자’라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게 지젝의 일갈이다. “민주당은 좌파적으로 우파의 경제 논리와 차별화돼야 하지 않느냐”는 대학생의 질문에 “질문은 감사하지만 우리는 자본주의자”라고 대답한 2017년 초 낸시 펠로시 민주당 의원을 거론하면서다. “지금 필요한 건 강력한 트럼프 반대뿐만 아니라 그가 부상한 배경이었던 자유주의 자본주의자들의 전통을 바꾸는 것이다.”
용기의 정치학
슬라보예 지젝 지음ㆍ박준형 옮김
다산북스 발행ㆍ444쪽ㆍ2만2,000원
코로나19 팬데믹은 오히려 기회일 수 있다. “바이러스 확산에 직면해 숨가쁘게 일선에서 뛰고 있는 의료진 등의 자기희생, 협력의 행동에서 새로운 연대의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젝은 믿는다”는 게 국내 번역을 감수한 이택광 경희대 교수 설명이다. 지젝은 말한다. “어서 시작해야 한다. 그냥 세상이 아니라 우리 세상 전체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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