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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기만을 위한 영예로운 호칭… 국민배우

입력
2020.05.29 04: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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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제기의 영화로운 사람] <6> 안성기 

 ※ 영화도 사람의 일입니다. 참여한 감독, 배우, 제작자들의 성격이 반영됩니다. <영화로운 사람>은 라제기 영화전문기자가 만나 본 국내외 유명 영화인들의 삶의 자세, 성격, 인간관계 등을 통해 우리가 잘 아는 영화의 면면을 되돌아봅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안성기 데뷔 60주년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한 배우 안성기가 웃으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한국영상자료원이 주최한 안성기 데뷔 60주년 특별전 개막식에 참석한 배우 안성기가 웃으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국내 TV다큐멘터리 대가인 김태영 감독은 2002년 뮤지컬 영화 ‘미스터 레이디’를 제작했다. 앵벌이 두목과 성전환수술을 한 종갓집 자손 등 사회 주변부 인물들을 다룬 작품이었다. 한국에선 시도되지 않던 장르에 파격적인 내용을 담았다. 배우 안성기와 가수 소찬휘가 출연했다. 영화는 촬영 중 제작비가 바닥나 완성되지 못했다. 김 감독은 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쓰러져 3일 만에 깨어났다.

김 감독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영화 ‘딜쿠샤’를 어렵사리 만들어 2016년 선보였다. 영화계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 ‘미스터 레이디’로 인연을 맺은 안성기도 힘을 보탰다. 2016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김 감독을 만난 안성기는 “계좌번호 좀 알려달라”더니 1,000만원을 송금했다. 김 감독은 “입금 내역을 확인하고선 공중전화부스에 들어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안성기와 관련된 여러 미담 중 하나다.

안성기는 5세이던 1957년 영화 ‘황혼열차’(전설적인 배우 김지미의 데뷔작이기도 하다)로 연기를 시작했다. 곧바로 충무로를 대표하는 아역배우가 됐다. 1959년 출연한 영화 ‘10대의 반항’으로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아역상을 수상했다. 한국 영화 최초로 해외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배우가 됐다. 1960년대 충무로 대표작으로 지금도 곧잘 소환되는 ‘하녀’(1960)에도 출연했다. 학업을 위해 연기를 중단하고 성인이 돼 스크린에 복귀하기까지 9년가량의 공백기를 제외하더라도 그의 연기 이력은 반세기를 넘는다. 50년대 이력을 시작해 2020년대에도 현장을 누비는 영화인은 오직 안성기뿐이다.

안성기가 활동하는 동안 컬러영화가 흑백영화를 밀어냈고, 디지털이 필름을 대체했다. 단성사와 피카디리 등 단관 극장 전성기가 지나고, 멀티플렉스가 보편화됐다. 수많은 감독들과 유명 배우들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안성기는 여전히 스크린에 모습을 비춘다. 단지 빼어난 연기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1990년 엑스트라로 영화 ‘남부군’ 촬영장에 간 적이 있다. 안성기와 최민수 등 유명 배우를 한자리에서 보는 호사를 누렸다. 고교 진학을 포기하고 현장에 막 뛰어든 10대 배우 임창정의 절박한 눈빛은 지금도 또렷하다. 여러 장면과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안성기다.

야외 촬영이 오래 이어져서 그런지 배우와 스태프는 지쳐 보였다. 사정 모르는 엑스트라들은 쉬는 시간 배우들에게 기념사진 촬영을 요구했다. 대부분이 손사래를 칠 때 안성기는 달랐다. 말없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기꺼이 피사체가 돼 주었다. 한 젊은 배우는 소품인 단도를 반복해서 땅에 내리꽂으며 현장에 대한 불만을 은근히 표시했다. 안성기는 그 배우에게 조용히 다가가 단도를 건네받았다. 젊은 배우의 혈기를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촬영장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묵묵히 자기 연기를 해내면서도 영화 현장 전체를 조망하는 그의 세심한 성격을 가늠할 수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다이빙벨’을 상영했다가 외압에 흔들렸을 때다. 이용관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물러나는 위기 속에서 많은 영화인들이 안성기를 새 집행위원장으로 추대하려 했다. 영화계의 신망이 두터운 데다 대중성을 방패 삼아 정치 외풍을 막기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안성기는 보기 드물게 만취까지 되며 집행위원장 추대를 고사했다고 한다. 자신은 “연기 밖에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한다. 연기를 천직으로 아는 안성기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안성기는 악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 과묵한 살인청부업자를 연기했고, ‘깊고 푸른 밤’(1984)과 ‘성공시대’(1988)에서 세속적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로 변신했다. 아무리 인상적인 악역을 연기해도 그는 커피 광고 속 푸근한 중년남성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돼 있다. 지나치다 싶게 반듯한, 스크린 밖 생활이 그에 대한 이미지를 강화했다. 1980~90년대 한국 영화가 어려울 때 그는 충무로 최고 스타임에도 출연료를 1억원으로 자진해서 동결하기도 했다. 많은 영화인들은 안성기를 ‘안스타’라 부르는데, 애정과 존경이 깃든 별칭이다.

안성기는 오래 전부터 국민배우로 불린다. 국민가수, 국민엄마 등 국민이 들어가는 호칭이 그에게서 비롯됐다. 2000년대 들어 국민이라는 수식이 남발되며 국민배우라는 영예로운 호칭은 빛을 바랬다. 대형 흥행작에 출연한 배우라든가 소탈한 면모를 지닌 배우라면 국민배우라는 수식이 쉽게 따른다. 많은 배우들을 국민이라는 단어를 붙여 부르면, 50년 넘게 활동하며 가족처럼 우리 곁에 있어 온 배우를 우리는 과연 뭐라고 불러야 할까. 과도한 수사가 넘쳐나는 시대라도 국민배우라는 강력한 별명은 한 사람, 안성기를 위해 남겨 놓아도 좋지 않을까. 스크린 안팎 여러 면모로 보아 그처럼 영화로운 사람은 참 드물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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