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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도 좁은데 인구 줄면 좋은 거 아니냐고요?

입력
2020.06.06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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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부족 없는 ‘적정인구’… 한국은 4000만명선 주장

인구가 줄면 자원도 줄고, 출산 포기로 후폭풍 낳을 수도

‘적정’이란 명확한 기준 없어…중요한 것은 생활의 품질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4> ‘적정인구론’이 착각이자 오해인 이유

※우리 사회의 출생아 수 감소와 고령자 수 증가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만큼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인구쇼크’가 눈 앞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미래가 예상되고 대응 전략은 무엇인지, 경제학자이자 인구 전문가의 눈으로 살펴보려 합니다. 전영수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가 <한국일보>에 3주 단위로 토요일 연재합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맬서스의 ‘인구론’은 식량과 인구의 차이(갭)에 주목한다. 인구는 기하급수, 식량은 산술급수로 늘어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식량이 인구의 증가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란 논리다. 결과적으로 이 가설은 틀렸다. 자본주의는 한계효용 제로사회로 치달으며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늘려 인구 증가를 감당하고 남을 만큼의 식량공급에 성공(?)했다. 대륙 별로 ‘양극화’라는 문제가 있을 지 몰라도, 적어도 총량 기준으로 식량 부족 문제는 해소됐다.

◇인구, 줄어도 괜찮을까

그럼에도 인구론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사회로 치환하면 욕망(인구)과 소유(자원)간의 엇박자는 갈수록 벌어진다. 더 많이, 빨리, 크게 갖고 싶은데 자원은 한정적이다. 그 간극만큼 쟁탈전은 치열해진다.

방법은 둘 뿐이다. 더 갖거나 덜 바라는 선택지다. 기하급수를 내리고 산술급수를 올리는 양자택일 중 하나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새무얼슨의 ‘행복방정식’도 비슷한 개념이다. ‘소유/욕망=행복’의 산식이 커지려면 분자인 소유(성취ㆍ소비)를 늘리기보다 분모인 욕망(탐욕ㆍ기대)을 줄이는 게 낫다고 했다. 불확실한 미래를 내걸고 현재를 저당 잡히지 않으려는 현 세대의 ‘소확행’과도 이어진다.

사실 인구론은 18세기(1789년)의 산물이었다. 산업혁명으로 양적 성장을 일궈낸 데다 전쟁ㆍ기근ㆍ기아의 3대 덫(Malthusian Traps)마저 사라져 폭발적인 출산행렬, 기하급수적인 인구증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구감소를 걱정하고 있는 한국을 포함한 선진국의 현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지금은 과거에 비해 모든 것이 풍족해졌으나, 출산을 하지 않는 게 걱정인 시대니 말이다.

문제는 이런 상황을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인구가 줄어도 식량이 유지ㆍ증가한다면 1인당 몫이 커지는 데 나쁠 게 뭐가 있냐는 얘기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 좁은 땅에 많은 인구가 모여 아등바등 살고 있으니 사람이 줄면 한층 쾌적하고 여유로워질 것이란 시각도 있다.

이런 논점은 ‘적정인구론’과도 맞닿아 있다. 적정인구란 자원부족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인구 규모가 어느 정도냐는 개념인데, 절대다수가 만족스러운 자원 수혜를 입으며 지속가능한 일상생활이 영위되는 최적인구를 뜻한다.

학계에서도 적정인구를 산출하려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대체적인 결과는 인구감소를 지지한다. 평가항목이나 측정기준이 달라 제각각이나, 한국의 현재인구(5,178만명)보다는 대부분 적은 숫자를 적정인구로 본다(2020년ㆍ장래인구추계). 한국인구학회는 4,600만~5,100만명, 국토도시학계는 4,350만~4,950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5,000만(2020년)·4,300만명(2080년)을 적정인구로 봤다. 통계청도 2065년 4,300만명을 적정인구로 뽑았다. 일부에서는 4,000만명 초반까지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지금보다 줄어드는 게 자원배분이나 경제유지 등 한국의 여력에 부합한다고 보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현재 한국은 ‘인구>자원’의 과밀상태란 얘기다.

추계인구와 적정인구 추이. <자료: 통계청>
추계인구와 적정인구 추이. <자료: 통계청>

◇적정인구론에 대한 몇 가지 반론

그런데 이 같은 관점에는 몇 가지 짚어볼 대목이 있다. 먼저 인구감소에도 불구하고 자원양이 계속 유지 혹은 확대될 수 있겠냐는 점이다. 인구감소에 비례해 자원규모도 줄어들면 적정인구론은 무의미하다. 적어도 배분자원은 똑같아야 1인당 몫도 커지는 법이다. 만약 자원이 줄어든다면 인구가 적어져도 상쇄효과는 낮다. 인구와 자원이 동반 감소하는 수축경제에 가까워진다.

추정컨대 인구감소에 맞서 자원공급이 유지나 확대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생산과 소비주체의 양적 감소는 경제적 산출가치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란 추정이 더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산업과 복지, 세제 등의 경제토대는 ‘인구규모=성장기반=재정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물론 인재고도화로 생산성혁명을 이뤄내면 적정인구론도 실현될 수 있다. 당연히 가야 할 길이나, 당장은 실현하기 어렵다. 양적 성장에 맞춰진 기존제도는 물론 생활양태와 가치인식까지 완벽한 재편개혁이 필수다.

또 하나 걱정은 적정인구론이 출산정책을 후순위로 미루는 근거로 작용할 가능성이다. 출산감소는 극복과제이지 수용해야 하는 현실이 아니다. 전대미문의 0.92명(2019년) 출산율은 이미 충분히 놀랍다. 방치하면 다음 세기 한국인은 멸종위기에 놓인다. 2명이 만나 2.1명을 낳아야 인구유지인데, 0.9명마저 아슬아슬한 현재수치는 한국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는 초대형 악재다.

올해 30만명선까지 깨질 출생자수에 적용해보면 1세대 후 14만대, 2세대 후 6만대, 3세대 후 3만대로 줄어든다는 계산이 나온다. 1세대가 ±30년이니 5세대ㆍ150년 후 정도면 한국의 출생자는 천명 단위로까지 추락한다는 무서운 결과가 도출된다.

이마저도 현재 조건의 유지를 가정한 낙관적인 셈법이다. 출산정책을 방치 혹은 포기, 연기하면 적어도 인구학적 디스토피아의 출현은 예고된 셈이다. 가뜩이나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이 많이 드는데다 성과조차 별로여서 회피하고픈 게 출산정책이다. 적정인구론이 다시금 출산정책의 관심도와 실효성을 낮추는 빌미를 줘서는 곤란하다. 가십거리에 가까운 적정인구론이 실제정책을 쥐락펴락해 혼선·갈등을 부추겨서는 안 될 일이다.

◇인구 줄어도 쏠리면 문제

더구나 적정인구론이 도농 불균형과 만나면 논점은 재차 흔들린다. 자원쟁탈 없는 쾌적하고 넉넉한 생활품질은 균형배분이 이뤄질 때 실현된다. 그런데 한국은 지역별 인구밀도를 볼 때 상당히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서울 등 수도권은 12%의 땅덩어리지만, 전체인구의 51%를 가졌다. 반면 나머지 88%엔 사람이 없어 빈집이나 비자경농지가 차고 넘친다. 도시는 인구 집중과 과밀이 문제라면, 농촌은 소멸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과소 상태가 문제다.

이 같은 불균형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수도권은 인재와 자금은 물론이고, 심지어 환자까지 블랙홀처럼 흡수하고 있다. 이 때문에 수도권의 한정자원은 51%의 거주민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수요 초과와 공급 부족은 가격 인상으로 직결되는데, 고성장ㆍ고임금 시대에는 그래도 버텨낼 힘이 있지만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자원 경합의 최일선이라 할 수 있는 서울은 생활약자부터 등 떠밀며 거대성곽을 구축하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아파트값이 대표적인 증거다. 서울발(發) 인플레는 부도심과 수도권까지 위협한다. 인구평준화를 위한 과밀 해소책이 없지는 않았지만, 정책은 대부분 대책에 패한다. 평균적으로 인구가 감소한다 한들 지역적인 집중이 계속되는 상황에선 적정인구론 자체가 무의미하다. 인구가 줄어도 쏠리면 문제인 것이다.

인구감소와 자원 수요의 상관 관계 역시 새로운 고려 지점이다. 인구가 줄어도 수요가 늘면 자원은 역부족이다. 자원공급이 획기적으로 늘지 않으면 자원양을 초과한 욕망의 총량은 적정인구론이 갖는 기대효과를 희석시킨다. 즉 인구감소에도 불구하고 ‘욕망(인구)>소유(자원)’가 지속돼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인당 몫이 커지면 사람이 줄어도 확보할 수 있는 경쟁은 저감되지 못한다. 커지는 양극화와 무너진 중산층을 볼 때 1인당 3만 달러를 넘긴 국내총생산(GDP)만으로는 행복 수준을 보장할 수 없다. 평균적인 고도, 압축의 양적 성장에도 불행호소가 일상적인 건 배분 갈등과 자원 부족 없이 설명하기 어렵다. 1인당 GDP가 1만5,000~2만 달러를 넘기면 행복과 소득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이스털린의 역설’을 간단히 깨는 현실이다. 46년 전인 1974년에 나온 이론이니 좀 더 금액을 높이는 게 맞다. 요컨대 인구 욕망을 만족시킬 자원 소유가 ‘아직’이란 얘기다. 하물며 적정인구 운운은 한가로운 일이다.

적정인구론은 합의하기 어려운 논제다. ‘적정’이란 애매한 단어에서 확인되듯 명확한 평가기준은 없다. 그보다 중요한 건 살아갈 이들의 생활 품질을 얼마나 높이느냐다. 살만한 사회여야 훗날을 기약할 후속 생산도 꾀해진다. 인구 규모가 얼마여야 한다는 화두보다 생활 수준이 어때야 한다는 기준이 먼저다. 행복에 닿는 삶의 질을 높이되 출산포기발(發) 인구감소의 중장기적인 끈질긴 대응 전략도 내려놔선 곤란하다. 유인은 달콤해도 결과는 뼈저릴 수밖에 없다. 어차피 한국사회는 2020년부터 자연감소가 확실시된다. 적정인구론을 내세워 사태 파악을 지체 혹은 회피하면 곤란하다. 논점에서 빗겨 설 여유는 없다. 충격적인 출산포기는 원인이 제도적 억압이든 개별적 선택이든 상당한 후폭풍을 낳는다. 인구감소가 좋다는 식의 적정인구론은 착각이자 오해에 가깝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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