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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건축주와 보낸 하루

입력
2020.06.05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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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처음 건축주와 연락한 날짜를 프로젝트 번호로 기록한다. 정식계약이 아니어도 전화 통화를 나누거나 프로젝트 검토를 한 날이 시작일이 된다. 180904는 홍제동주택의 프로젝트명이다. 올해 2월에 준공이 되었으니 설계와 시공에 18개월 정도 걸렸다. 집주인으로부터 집 구경하러 오라는 초대를 받고 일주일 전부터 즐거웠다.

1년 넘게 현장을 다녔고 여전히 머릿속에 설계도면이 다 들어 있지만 온전히 건축주의 공간이 된 집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집이 완공되어 건축가의 손을 떠난 뒤엔 보고 싶은 마음도 내려놓는 쪽이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아직 이사 오기 전, 주방 가구조차 마무리가 되지 않았을 때였다. 살림살이가 들어오면서 집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그 공간에 어울릴 작은 선물을 하는 게 나름의 원칙이다. 그런데 이 집은 주인들의 감각이 워낙 탁월하다. 가구면 가구, 조명이면 조명, 오랜 시간에 걸쳐 공들여 하나씩 들여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하는 분들이다 보니 물건으로 나의 위트와 진심을 전달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렇담 위트 있는 먹거리가 어떨까? 와인은 잘 모르고 과일도 복불복이니, 영화 기생충에 나와서 더 유명해진 페인트통에 든 감자칩을 골랐다. 맛있는 것은 언제나 옳다. 부디 감자 알레르기가 없기를!

오랜만에 현장에 오니 그 동안의 시간이 말 그대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꿈꾸는 집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집은 건축주와 건축가, 시공팀이 팀워크를 이뤄가며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설계를 하다 보면 가족들의 의견을 모두 수용하는 과정부터 팀워크를 이뤄야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들 부부는 성격이 정반대라 할 정도로 달랐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담아 가는 과정은 엎치락뒤치락의 연속이었다. 모두의 이야기가 이유가 있었기에 듣고 조정하기를 반복했다. 비용의 문제도 넘어야 할 산이었다. 조정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다치기도 했다. “집을 짓는 이유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괴롭히고 있었다”고 생각한 후엔 훌훌 털고 다시 마음을 잡았다고 한다. 직업으로 그림을 그리는 분들이라 계획안에 대한 피드백은 언제나 예쁜 그림으로 돌아왔고 그 즐거움은 앞으로도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의 집엔 우리를 연결해 준 나의 옛 건축주 부부가 함께했다. 그의 프로젝트명은 140714이다. 입주한 지 4년 차와 새내기 입주자, 그리고 건축가가 만나니 집 짓는 이야기가 술술 나온다. 그동안 함께해온 반려동물 이야기, 새로 들인 식물 이야기, 커피와 음악 이야기까지 취향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대화가 끝이 없다. 집에서 즐기는 현재의 삶을 즐겁게 이야기하니 건축가로서 이보다 더 좋을 일이 있을까 싶다. 볕이 가득한 작업공간에서 주인이 애청하는 스피커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주인이 내온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하는 시간은 프로젝트에 대한 가장 큰 보상이다.

그들과 헤어진 뒤, 작업실로 돌아오니 나와 아내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에 안부를 나누며 일 이야기, 삶 이야기를 나눈 그분 역시 수년 전 지방의 작은 마을에 집을 짓고 싶다고 찾아오면서 나와 인연이 되었다. 건축주의 개인 사정으로 프로젝트는 중단되었지만 이따금 불현듯 연락이 닿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자연이 좋아 자연 속에 집을 짓고자 했던 그분은 지금 바로 산과 맞닿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프로젝트명은 120201이다. 비록 지어지지 않았지만 그분과 나누었던 여러 가지 꿈들은 여전히 행복한 기억이다. 집주인은 완성된 집에서 좋은 추억을 쌓아 가지만 건축가는 집을 짓는 과정의 모든 장면이 추억이다. 추억은 살아갈 힘을 준다.

정구원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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