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회에나 중도층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념’으로서 중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지 레이코프에 따르면 ‘중도층’이란 사안에 따라 때로는 진보적으로, 때로는 보수적으로 투표하는 스윙보터층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이들 중도층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을 이룰 가능성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현행 소선거구제 하에서 제3정당이 의미 있는 세력으로 존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이 바뀌었으나 정치만은 여전히 87년 체제에 갇혀 있다.
◇정치의 독점
시장에는 기업들 간의 경쟁을 보장하기 위한 독점금지법이 존재한다. 시장에서 경쟁이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잘 안다. 혁신이 사라져 생산성이 저하하고, 공급자의 횡포에 소비자만 피해를 입게 된다. 정치도 다르지 않아 경쟁이 사라진 곳에 발전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 정치에는 독점을 방지할 장치가 없다. 두 거대정당의 독점이 아예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다. 우리 정치가 퇴행을 거듭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정치가 발전하려면 진보에서는 민주당과 경쟁할 대안세력이, 보수에서는 통합당과 경쟁할 대안세력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행 선거제도는 대안을 허용하지 않는다. 20대 총선이 만들어낸 다당구도는 21대 총선 후 강력한 양당제로 되돌아갔다. 이번 총선에서 양당의 열성적 지지자를 뺀 나머지 유권자의 대다수는 좋아하는 정당을 ‘지지’하는 긍정적 투표가 아니라, 더 싫어하는 정당을 ‘비토’하는 부정적 투표를 했을 것이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그대로 두고 두 거대정당의 대안세력이 나오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치를 독점한 세력들은 기득권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는다. 누더기 상태로 도입된 연동형 비례대표제마저 두 당은 위성정당으로 간단히 무력화시켜 버렸다. 애초에 이 제도를 민주당에서 좋아서 도입한 것도 아니지 않나. 통합당에서는 21대 국회가 열리기도 되기 전에 벌써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폐기하는 내용의 법안부터 만들었다.
◇국가주의에서 민족주의로
이것이 중도의 설 자리를 빼앗는 ‘제도적’ 조건이라면, 중도를 허용하지 않는 ‘문화적’ 조건도 존재한다. 오랫동안 보수정권은 반대자들을 ‘반국가 분자’로 몰아왔다. 국민의 일부를 비(非)국민으로 몰아 배제하는 것은 일본 군국주의 문화의 잔재다. 이 국가주의 폭력에 민주화 운동권은 민족주의 폭력으로 대항해 왔다. 상대를 비국민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이들도 마찬가지. 이들은 자신의 반대자들에게 ‘반민족 행위자’의 낙인을 찍는다.
군사주의 멘탈리티에 사로잡힌 사회에서 중도는 ‘비국민’이 되지 않기 위해 어느 편에 속해야 한다. 그래야 적군의 공격을 받더라도 아군의 엄호를 받을 수가 있다. 그 사이에 변한 것이 있다면 이 사상전의 헤게모니가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과거에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것은 이견을 가진 자를 ‘빨갱이’로 몰아가는 반공주의 프레임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것은 반대자를 ‘친일파’로 몰아가는 민족주의 프레임이다.
과거에 보수정권의 지지자들은 빨갱이의 온상이라며 호남을 고립시켰다. 이제는 민주당 지지자들이 토착왜구의 본거지라며 대구경북을 고립시킨다. 김어준의 코로나 사태의 본질을 “대구사태”로 규정했다. 전우용, 김정란, 공지영 등 지식인들까지 나서서 노골적인 지역혐오 발언을 늘어놓는다. 군사정권 시절의 국가보안법이 사실상 사문화되자. 이제 그 반대편에서는 5ㆍ18에 대해 ‘역사왜곡금지법’이라는 이름의 민족보안법을 제정하려 든다.
◇빨갱이에서 토착왜구로
그 변화의 결과 ‘빨갱이’로 불리던 나는 이제 ‘토착왜구’가 되었다. 이게 나만의 사정일까. 과거에는 행여 ‘반국가사범’으로 몰릴까 주변을 경계했으나, 이제는 ‘반문재인사범’으로 찍힐까 주위를 조심해야 한다. 정권을 위한 것이라면 공중파에 음모론까지 허용하면서, 어용지식인의 선동이 방송사의 취재팀을 날리고, 마음에 안 드는 방송에는 중징계를 때린다. 대중들 사이에 입바른 기자들 명단이 나돌며, 심지어 기자가 대낮에 테러를 당한다.
황당한 것은 정작 두 거대정당이 이 변화를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합당은 몰락하고서도 여전히 자신이 주류라 착각하고 ‘지배’의 언어를 구사한다. 민주당은 기득권을 세습하는 단계에 이르렀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재야세력처럼 ‘해방’의 언어를 구사한다. 변화한 상황에 아직 적응이 안 돼 피차 제 본질을 ‘오인’하는 셈이다. 군사정권의 언어나 운동조직의 언어나 어차피 타자를 배제의 대상으로 보는 것은 마찬가지다.
양쪽이 아마겟돈의 결전을 벌이면 시민사회의 객관적ㆍ보편적 가치 위에서 이 싸움이 생산적 대결로 흐르도록 견제하는 심판관이 있어야 한다. 전통적으로 그 역할은 시민운동이 맡아 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시민운동 단체들까지도 이 ‘오인’의 상태에 빠져들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미 기득권 체제의 일부가 된 지 오래건만, 여전히 자신들이 개혁세력이라는 허황한 환상에 취해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관변단체 노릇을 하고 있다.
◇전쟁의 은유
가령 우희종 교수는 민주당을 위해 위성정당을 만들었다. 진영논리에 빠져 자기들이 세운 ‘정치개혁’의 대의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다.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에는 “검증”을 요구했다. 사안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시선으로 본 것이다. 그러더니 얼마 전엔 “친일에서 종미로 변신해 온 집단을 정리”하겠다고 한다. 과거에 보수가 ‘종북’ 사냥을 했듯이 이제는 자기들이 ‘종미’ 사냥을 하겠다는 얘기다. 요즘 시민사회는 이런 일을 한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자유민주주의자에게 경쟁상대는 결코 섬멸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이 못 보는 것을 내가 보듯이, 내가 못 보는 것을 그들이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상대의 존재를 외려 소중히 여긴다. 하지만 독재정권과 운동세력이 공유했던 ‘군사적 멘탈리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국가가 발전하려면 상대를 제거(“정리”)해야 한다는 관념이 팽배하다. 하지만 국가라는 새가 한쪽 날개만으로 날 수는 없는 일이다.
전쟁의 진리는 승리에 있다. 전쟁에서는 이긴 자가 곧 정의다. 거기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공’을 세우는 것만이 평가된다. 극단적 사유를 가진 이들이 권력을 잡고, 지지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의 지휘에 따르는 병사로 전락한다. 병사들에게 상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멸해야 할 ‘적군’으로, 제 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엄호해야 할 ‘아군’일 뿐이다. 내부의 비판은 ‘내부총질’로 여겨져 군사재판에 회부된다.
◇중도는 없는가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일단 심판 노릇을 할 시민단체부터 바로 서야 한다, 시민단체들은 자기들이 기득권에 맞선 저항세력이라는 ‘오인’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당은 이미 이 사회의 지배계급이고, 시민단체는 이미 그들과 기득권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를 인정해야 한다. 윤미향 사건도 권력과 유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시민단체는 이제라도 권력으로부터 독립해 본래의 감시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정당은 군사적 멘탈리티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장의 함구령에 의원들이 중요한 사안에 의견도 말하지 못하는 거수기로 전락한 것은 정당이 군대처럼 운영되고 있다는 뜻이다. 유권자들은 정당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어야 한다. 정당이 잘못하면 언제라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주관적으로는 나라를 구하는 성전을 치를지 몰라도 객관적으로는 의원들의 기득권이나 챙겨주는 사노비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이념으로서 중도는 없다. 하지만 사안에 따라 선택을 달리하는 스윙보터가 있고, 고정된 지지정당이 있어도 당의 잘잘못을 가리는 합리적 지지층이 존재한다. 이들 합리주의자들이 각 정당에서 진영논리에 빠진 극단주의자들로부터 헤게모니를 되찾아야 한다. 정치도 경쟁이 있어야 발전하는 법. 진보든 보수든 진영 내에서 대안세력이 나올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진영정치의 물적 토대가 되어주는 소선구제부터 바꿔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몸은 자랐지만, 아직 옷은 87년의 것 그대로다. 사회의 모든 영역이 발전했지만, 정치만은 외려 과거로 퇴행하는 중이다. 이제 ‘포스트 87년’ 체제를 꿈꾸어야 한다. ‘개혁’이라는 말이 이권을 지키고 비리를 감추는 텅 빈 수사로 전락한 지금, 필요한 진정한 ‘개혁’은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 이 개혁에 실패할 경우 우리 사회는 과거 일본이 걸었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미 도처에서 그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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