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파격에 ‘의제 주도권’ 뺏길까 긴장
통합당 ‘보수 논쟁’ 넘어 ‘파괴적 혁신’할까
민생 정책 대결로 한국 정치 수준 높이길
미래통합당 김종인 비대위원장을 바라보는 더불어민주당의 속내가 복잡하다. 김 위원장이 연일 기본소득과 재정 문제, 리쇼어링 등 굵직굵직한 경제 이슈를 제기해도 별다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김 위원장의 발언이 아직 정책으로 구체화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그보단 ‘김종인 비대위’에 대한 성격 규정이 내려지지 않아서라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이다.
´철새 정치인’ ‘정치 기술자’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서 김 위원장을 자주 소환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정책을 만들어내는 이슈 장악력과 여론 주도력이 정평이 나있기 때문이다. 좌우를 넘나든 정치 이력이 말해주듯 그는 이념적 성향에서도 자유로워 ‘탈이념 실용주의자’에 가깝다. ‘보수’ ‘자유 우파’ 용어 사용 금지령도 새로운 게 아니라 2012년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 때부터 그의 일관된 주장이다.
통합당이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김 위원장을 삼고초려 끝에 옹립한 것은 그만큼 벼랑으로 내몰린 탓이다. ‘보수’라는 간판 정도가 아니라 뿌리까지 갈아엎어서라도 당을 살려내야 할 판이다. 내후년 대선에서도 패배하면 아예 당이 소멸될 위기에 놓여 있음을 통합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민심을 얻으려면 새로운 시대정신인 민생과 복지에서 승부를 걸어야 하고, 그러기에는 김종인만 한 인물이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간 ‘독일식 경제개혁’을 강조해온 김 위원장이 제시할 정책은 보수 야당이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일 것이다. 사회안전망 강화와 혁신적 복지모델 구축 등의 정책 대안은 코로나 사태로 고통받는 현실과 맞물려 기존의 정치 판도를 흔들 수 있다. ‘약자와의 동행’ ‘따뜻한 자본주의’를 내건 후 통합당 지지율이 4%포인트 이상 오른 것이 이를 보여 준다.
민주당이 고민하는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일단 여당은 기대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다. 김 위원장이 지향하는 방향이 민주당의 견해와 대체로 일치해 정책 논의가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본다. 문재인 정부 후반기 가시적 성과에 목마른 민주당으로서는 김 위원장을 동반자로 여겨야 할 상황이다.
하지만 속사정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민주당이 독점하다시피 한 주요 의제의 주도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적지 않다. 메시지 생산 능력이 뛰어난 김 위원장이 선제적으로 의제를 띄우고 민주당이 뒤치다꺼리를 하는 상황은 여권으로선 최악이다. 당장 김 위원장이 기본소득 얘기를 꺼내자 청와대와 정부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 메시지를 던지고 민생과 개혁을 주도하는 통합당의 모습은 대선 가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사실 민주당으로서는 김종인 노선을 ‘악성 포퓰리즘’으로 몰아붙이는 유승민 전 의원이나 “좌파 2중대 흉내내기”라고 비판하는 홍준표 의원이 훨씬 상대하기에 수월하다고 여길 것이다.
김 위원장의 당내 입지는 취약하다. 보수 진영의 반발이 거세지면 그로서는 속수무책이다. 통합당 내 인적 쇄신을 주도할 힘도 없고 임기는 1년에 불과하다. 지금은 ‘계엄령’이 선포돼 순응하는 듯 하지만 구체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으면 김종인은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 민주당에 이런 상황은 유리한 걸까.
국민이 민주당에 거대 의석을 준 것은 코로나라는 미증유의 위기를 극복해 달라는 요구였다. 실패하면 그 책임은 통합당이 아니라 민주당에 고스란히 돌아가게 된다. 정치공학적 이해타산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김종인 비대위를 코로나 사태를 돌파할 선의의 경쟁자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
당쟁으로 밤낮을 지새던 한국 정치에 모처럼 정책으로 승부할 기회가 열렸다. 헤겔이 ‘법철학’ 서문에서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는 격언을 인용한 것은 아무리 숭고한 이념도 그 정당성은 현실에서 증명돼야 한다는 수사였다. 정치의 본질은 현실 속에서 구체적 성과를 내는 데 있다. 민주당과 통합당이 평가받아야 할 건 오로지 ‘실력’이다.
수석논설위원cj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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