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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축사회가 온다] “고도성장기 호봉제, 더는 감당 못해”… 대안 떠오르는 직무급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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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축사회가 온다] “고도성장기 호봉제, 더는 감당 못해”… 대안 떠오르는 직무급제

입력
2020.06.15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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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끝> 임금수축과 일자리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들이 차량을 제조하고 있다. 쌍용차 제공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생산직 근로자들이 차량을 제조하고 있다. 쌍용차 제공

13분기 연속 적자를 낸 쌍용자동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감염증 사태에 따른 수출 부진까지 겹치면서 유동성 위기에 몰렸다. 감사인인 삼정KPMG가 1분기 실적보고서를 내며 감사 의견을 거절했을 정도다. 당장 유동자산 매각에, 고정비를 줄이며 정부 지원에 의지해야 할 판이다.

쌍용차 경영 위기의 원인 중 일부는 고정비 지출에 있다. 2011년 전체 매출액에서 12%를 차지했는데, 지난해 22.3%로 2배 가까이 상승했다. 고정비의 주요 항목인 인건비는 이 기간 연평균 12.8%씩 뛰며 2,333억원에서 4,289억으로 급증했다. 직원 1인당 연봉이 5,400만원에서 8,600만원으로 오른 결과다. 쌍용차는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오르는 호봉제를 택하고 있는데, 직원 평균 근속연수가 22년에 달한다. 쌍용차 관계자는 “임금이 상승한 측면도 있지만, 정기 상여금 등을 통상임금에 포함하도록 한 법원 판결에 따르다 보니 인건비 총액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쌍용차 사태는 성장이 멈춘 수축사회 속 기업의 단면을 보여준다. 고성장 시절 설계된 임금제도인 호봉제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하면서,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효율성 높은 임금체계로의 전환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저작권 한국일보]주요 임금체계 비교 그래픽=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주요 임금체계 비교 그래픽=강준구 기자

 ◇성장동력 잃은 시대 생존방법 

기업들이 과도한 임금제로 꼽는 호봉제를 그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우리나라가 고도성장 사회였기 때문이다. 매년 3%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유지하던 시절에는 기업도 함께 매출을 높이며 성장할 수 있었지만, 이젠 그런 호시절은 끝났다. 자동차 산업만 보더라도, 생산대수가 2011년 465만대로 정점을 찍은 이후 매년 감소세를 보이며 지난해 395만대까지 추락했다.

호봉제와 달리 직무급제는 업무의 난이도와 성과에 따라 보상 체계가 달리 형성돼 있기 때문에 고참 직원이 많은 오래된 기업일수록 인건비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상대적으로 힘든 일을 맡은 직원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져 업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성장동력이 떨어진 우리 기업들에게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삼양그룹이 2002년 3월 호봉제를 버리고 전 직원 대상 직무급제를 도입한 것도 도전과 혁신의 원동력이 쇠퇴했다고 판단해서였다. 삼양은 직무를 1,900여가지로 세분화하고 각각의 난이도나 회사 기여도에 따라 등급(1~4)을 부여했다. 가령 마케팅팀 내에 마케팅 커뮤니케이션, 브랜드 매니저, 기획, 운영, 해외 마케팅 등의 직무를 구성한 후 각 직무별 등급을 달리 매기는 식이다. 직무 등급별로 임금의 상ㆍ하한선을 정해 능력이나 성과에 따라 급여에도 차등을 뒀다. 삼양 관계자는 “1924년 창립 이래 식품과 화학 사업을 영위해오다 보니 혁신이 정체됐다”며 “도입 후 성과에 대한 합리적 평가가 이뤄지면서 자리를 잡아갔다”고 말했다.

 ◇임금 체계 변화 과도기 

국내 기업들은 호봉제에서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다. 직원 100명 이상 기업 중 호봉제를 유지하는 곳은 58.7%(지난해 고용노동부 조사)로, 2016년(63.7%)보다 줄었다. 호봉제를 포기한 기업들은 기존 호봉제에 직무ㆍ직능ㆍ역할급적 요소를 가미해 변화한 임금 체계를 만들었다. 이상호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정책팀장은 “직무급제 전면 도입 기업조차 직급간 월급 차이가 크지 않아 ‘무늬만 직무급’인 경우가 적지 않지만, 임금 체계가 변해야 한다는 데는 대체로 동의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노동조합의 반대가 강한 생산직에 대해 호봉제를 폐지한 대기업도 있다. LG이노텍은 근속연수보다 직무 역량을 중시해야 한다는 노사 간 공감으로 2016년 성과연봉제를 도입했다. 생산현장 직원의 80%가량이 20, 30대 젊은 직원이라는 점이 선제적인 인사제도 전환을 가능하게 한 배경으로 꼽힌다. LG이노텍 관계자는 “2014년부터 2년 동안 매달 노조와 대화하면서 임금체계 전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넓혔다”며 “외국 기업 사례를 벤치마킹하고, 현장 구성원 의견도 청취했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공공기관조차 호봉제의 벽을 쉽사리 깨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문재인 대통령 공약사항이지만 현재 한국석유관리원ㆍ새만금개발공사ㆍ한국재정정보원ㆍ한국산림복지진흥원ㆍ국가생명윤리정책원 등 소규모나 신생 공공기관 5곳만 직무급제를 도입했을 뿐이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연차가 오래된 직원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높은 데다, 급여 변동이 있기 때문에 노조와 협의 없이 도입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저작권 한국일보]국내 기업 호봉제 비중 그래픽=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국내 기업 호봉제 비중 그래픽=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국가별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 격차 그래픽=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국가별 연공서열에 따른 임금 격차 그래픽=강준구 기자

◇“부족한 사회 안전망 대신할 수도”

임금 체계 변화는 시대적 흐름이라 거스를 수 없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우선 급속히 진행 중인 고령화에 대해 정부에선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선진국에 비해 부족한 현실 때문에 근로자들에게 일자리 유지는 절실하다. 생산가능 인구가 급감하고 있지만, 출생률 증가 정책도 사실상 효과를 보고 있지 못하다. 정년을 연장해 부족한 인력을 수급하고, 이들 스스로 생활비를 마련하도록 유도하는 게 그나마 실현 가능한 대책인 셈이다.

기업 입장에선 이 경우도 인건비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현재 만 60세인 정년을 65세로 늘리면 기업이 추가로 한 해 15조8,000억원이 넘는 인건비를 감당해야 할 만큼(한국경제연구원, ‘정년연장의 비용 추정과 시사점’ 보고서) 부담이 크다. 유진성 한경연 연구위원은 “정년 연장을 위해선 임금 체계 개편이 필수”라며 “그렇지 않으면 청년 일자리를 줄이며 중·장년층 고용을 유지하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학계에선 직무급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인건비를 효율적으로 책정하는 대신 고용을 늘려 사회 안전망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고령화가 앞서 진행된 선진국을 보더라도 그렇다. 한경연의 ‘주요국의 노동시장 유연ㆍ안정성 국제 비교 및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회사 내에서 경력이 짧은 근로자와 긴 근로자의 임금 격차를 뜻하는 ‘임금 연공성’이 우리나라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가운데 가장 높은 4.39배(근속 30년 이상, 1년 미만 근로자의 임금 격차)다. 반면 독일은 1.89배, 영국 1.67배, 덴마크 1.44배에 그친다.

연구를 담당한 이상희 한국산업기술대 지식융합학부 교수는 “인구 고령화에 먼저 도달한 미국은 노동시장 수요에 맞춰 직무가 형성되며 보수와 연결됐고, 유럽도 과거 노조에서 스스로 직무를 만들어 직원들 가치를 높였다”면서 “직무 가치로 일자리가 자리잡으면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격차가 줄어 자연적 노동 유연성까지 높이는 효과가 생긴다”고 말했다.

박관규기자 ace@hankookilbo.com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저작권 한국일보]직무급제 도입한 공공기관 그래픽=강준구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직무급제 도입한 공공기관 그래픽=강준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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