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인생의 막이 바뀌는 시점이 아니었다면 꼭 가보았을 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지난주까지 대구 범어성당 갤러리에서 열렸던 ‘식물채집가 에밀 타케 신부의 식물표본 전시회’입니다. 에밀 타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신부는 24세에 사제 서품을 받고 당시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되신 프랑스외방선교회 소속 신부입니다. 55년간 한국에서 선교하셨고 지금도 대구 성직자묘지에 계십니다. 특히 1902년부터 1915년까지 제주에 계시는 동안, 선교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시작하셨던 식물 채집 활동으로 전 세계에 만점에 가까운 표본을 남겼습니다. 이번 전시에는 이 가운데 수우 이창복 교수가 서울대학교에 남기시거나 국립수목원 표본관에 기증하신 백 년이 넘은 표본들이 공개됐습니다.
남겨진 표본을 포함한 타케신부의 채집 활동과 기록은 우리나라 식물분류학 근대사에 매우 특별한 의미를 남기고 있습니다. 당시 일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포리(Pere Urbrain Jean faurie, 1847~1915)신부에게 식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표본채집방법 등을 배우면서 인연을 맺게 된 타케 신부는 동쪽에 있는 이 나라들에 자라고 있을 식물이 궁금했던 서양의 학자들에게 식물표본을 보내주고 대신 선교활동비를 지원받으면서 시작되었지만, 점점 의미 있는 식물을 알아볼 수 있는 전문가와 같은 안목을 키워나간 듯합니다.
1907년에 발견, 미국 아널드 수목원에 보내면서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린 우리의 특산식물 구상나무(Abies koreana)를 비롯하여 그분이 처음 발견한 우리 식물이 여럿입니다. 섬잔대(Adenophora taquetii)와 같은 일부 식물은 학명으로 그의 이름을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 가운데서 대표적인 발견은 아무래도 아직까지 자생지 논란이 계속되는 왕벚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왕벚나무는 1901년 일본의 마쓰무라(松村) 박사에 의해 신종(新種)기재되었지만, 기준표본의 채집지를 정확히 하지 않았습니다. 1908년 4월 타케 신부는 한라산 관음사 뒷산 해발 약 600m의 숲속에서 벚나무류 표본 한 점을 채집(표본번호 4638호)을 독일 베를린대학의 쾨네 박사에게 보냈고 그는 이 식물이 일본에 자생지가 없던 왕벚나무로 확인했습니다. 이어서 일본의 여러 학자가 한라산이 왕벚나무 자생지임을 지지하게 되었고 기록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타케 신부는 1911년 포리 신부에게 왕벚나무를 몇 주 보내었고, 그 답례로 온주밀감 14그루를 받아 어려운 사람들에게 재배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제주를 상징하는 제주 밀감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재래종 감귤의 재배 기록은 삼한시대부터 이어지지만, 오늘날 우리가 가장 흔히 재배하여 먹고 있는 온주밀감은 타케신부에 의해 들어오게 된 것이지요.
이번 타케신부의 식물표본 전시회를 만나며, 가장 놀란 것은 식물학자가 아닌, 백여년 전 벽 안의 신부의 행적과 그 영향에 마음을 움직인 신부님과 민간인들에 의해 이분의 기록들이 모이고 작가들은 그림과 동화를, 신부님은 책을, 록밴드 활동을 하는 의사는 헌정 앨범을 만드는 등 여러 사람이 마음을 모아 생태 포럼을 이어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의 감귤나무는 원산지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개량되어 들어왔고 이제 우리의 대표적인 과일이 되었습니다. 재배도 많이 하고 새롭고 향기롭고 달콤한 품종도 많이 만들었으니까요. 그가 찾아낸 왕벚나무도 식재한 일본 나무와는 다른 우리 고유의 유전적 특성을 가진 자생지나무가 확인되었으니 이제 일본의 사쿠라 문화와는 차별화된 우리만의 그 무엇으로 발전돼야 비로소 벚나무 논란을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바이러스 하나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 삶을 흔들 만큼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지금, 말이 아닌 창조적 행동으로 진짜 우리의 것들을 만들어 가고 있을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꿔 봅니다.
※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제 부족한 지면의 제목 “다시 광릉숲에서”가 “수목원 산책길”로 바뀌었습니다. 수십년간 일해 왔던 광릉숲의 국립수목원을 지난달로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제 삶은 항상 식물들이 모여 사는 수목원 산책길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유미 산림식물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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