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이제 페미니즘은 거역할 수 없는 흐름이 됐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 여전히 어렵습니다. ‘바로 본다, 젠더’는 페미니즘 시대를 헤쳐나갈 길잡이가 돼줄 책들을 소개합니다. 손희정 문화평론가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5>?페기 오렌스타인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
나는 딱히 좋은 고모는 아니다. 올해로 열 살이 된 하나 뿐인 조카를 못 본지 어언 두 달이 넘어가고, 6월이 끝나가도록 어린이날 선물도 못 줬다.
5월 초에 선물로 ‘모찌모찌 인형’을 갖고 싶다던 조카가 최근 생각이 바뀌었다며 카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다. 사진 속에서는 비현실적으로 하얀 피부에 커다란 눈, 9등신 비율을 ‘뽐내는’ 여자인형이 하늘하늘한 레이스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 중인 구체관절인형이라고 했다.
한 번도 조카가 원하는 선물에 “안 된다”라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이번만은 양심이 외쳤다. “이건 좀 아니지 않니?” 지금까지 조카는 대체로 조립식 블록을 원했다. 여아용 블록은 ‘분홍분홍’하긴 해도, 적어도 다양한 인종과 직업을 가진, 다양한 모습의 소녀들이 등장했다.
나는 조카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선물에 대해서는 고모랑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좀 나눈 뒤 결정할까?” 조카는 흔쾌히 “알겠다”고 답했다.
좋은 고모는 못 되어도 필요한 질문들을 나눌 수 있는 고모는 되고 싶다는 생각에 책장에서 책을 한 권 뽑아들었다. 페기 오렌스타인의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먹었다'였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오렌스타인은 딸을 키우면서 디즈니 공주 굿즈의 방대한 세계와 만난다. 그리고 각종 공주 이야기와 온갖 분홍색 상품들로 대변되는 ‘여성스러운 소녀’ 이미지를 강조하는 미국 대중문화를 비판적으로 보게 된다.
그에 따르면 이런 문화에서 여자 아이들은 우울증과 섭식장애를 겪을 위험이 높아진다. 특히 아이들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몸을 판단하는 ‘자기 객관화’로 고통을 겪게 되는데, 이는 물론 낮은 자존감으로 이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염려에 대해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반박한다. 여자 아이들은 날 때부터 분홍색에 끌리고, 꾸미기를 좋아하며, 인형과 함께 하는 ‘돌봄 놀이’를 즐긴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미국학 연구자인 조 파올레티에 따르면, 20세기 초까지도 남아는 하늘색, 여아는 분홍색이라는 색 구분은 전혀 상식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대체로 쉽게 삶을 수 있는 흰색의 옷을 입었고, 오히려 분홍색이 남아의 색으로 여겨졌다. 당시 군복의 색이자 열정을 상징하는 색이었던 빨간색의 파스텔 톤이 분홍색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정결’을 상징하는 파란색의 파스텔 톤인 하늘색이 여아들의 색으로 여겨졌다. (디즈니가 1950년에 디자인한 신데렐라가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1980년대, 아동 용품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다양한 상품이 개발된다. 생애주기를 더 세밀하게 나누어서 나잇대 별로 필요한 물품이 세분화되고, 성별 역시 구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아용, 여아용 물품이 따로 생산 판매된다. 분홍색이 원래부터 여아에게 매력적이었던 것처럼 포장되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다. 마케팅이 ‘분홍 신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게 색이 성별화되자, 각각의 색에 다른 의미가 덧붙여진다. 청색 계열엔 이성, 침착함, 용기, 활동 등의 의미가, 홍색 계열엔 감성, 부드러움, 연약함, 섹시함 등의 의미가 달라붙은 것이다. 남아는 푸른 계열을, 여아는 분홍 계열을 좋아하도록 유도됨으로써, 아이들은 이를 통해서 다시 사회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내면화하게 된다. 이런 문화는 (특히 여자) 아이들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신데렐라가 내 딸을 잡아 먹었다
- 페기 오렌스타인 지음
- 김현정 옮김
- 에쎄 발행
- 336쪽ㆍ1만5,000원
나는 조카가 분홍색을 거부하고 인형을 불태우길 원하진 않는다. 그가 자신의 선호를 탐색하고, 스스로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그것을 충분히 실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스스로를 잘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할 뿐이다.
그렇다면 “구체관절 인형을 원한다”고 정확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 조카와 나는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까? 아직 답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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