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 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노후준비에는 부동산만한 게 없다. 땅을 사서 상가주택을 지어 세를 놓으면 두둑한 월급 같은 월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주의 노후는 주택의 입지가 좋을수록, 전용률(분양면적 대비 전용면적 차지 비율)이 높을수록, 건축기간과 비용이 짧고 적을수록, 공실이 없을수록 든든해진다.
올해 2월 광주 봉선동의 오래된 주택가에 들어선 ‘글레이어(glayerㆍ회색 켜)’는, 상가주택이라면 누구나 떠올리는 '임대수익 건축 공식'을 거부한 상가주택이다. 우상완(51)ㆍ박정화(47)씨 부부가 이 주택을 지은 목적 또한 노후준비였건만, 이들은 처음부터 건축가에게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부부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광주의 대치동’이라 불리는 학군 좋은 봉선동의 아파트에서 살았다. 3년 전 인근 주택가의 육각형 땅(대지면적 620㎡)을 샀다. 여느 오래된 주택가처럼 봉선동도 1990년대 지어진 아파트와 주택, 목욕탕, 음식점 등이 뒤섞여 있던 곳.일부러 안쪽 땅을 샀다. 부부는 “큰 길을 끼고 있으면 세는 잘 나가겠지만, 안에 사는 사람들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라며 “우리가 짓는 집이 동네 안쪽의 보물 같은 공간이 되갈 바랬다"고 말했다.
상가주택은 사람들 왕래가 많고, 접근하기 좋은 1층의 임대료가 가장 높다. 그런 1층 면적을 최대한 늘리기 위해 법적 경계까지 땅을 꽉 채워 공간을 확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하1층, 지상6층 규모(연면적 1,483.68㎡)로 지어진 부부의 주택은 그 공식부터 버렸다. 이 건물 1층에는 낮은 주차장과 작은 전시공간이 전부다.
설계를 맡은 조경빈 건축가(필동2가 아키텍츠)는 “사선이 많은 땅이어서 지하로 주차공간을 내기 어려운 현실적인 조건도 있었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내어줄 수 있는 공간과 그 경계를 고려해 1층을 비웠다”고 설명했다. 오가는 이들의 시야를 막지 않도록 1층을 헐거운 공간으로 만들어두니 후미진 뒷골목에 여유를 주면서 자연스레 시선을 위로 끌어 당긴다.
2~4층은 상업공간이다. 각 층마다 면적(건축면적 357.65㎡)은 같지만 구성은 다르다. 똑같은 구조가 층마다 반복되는 걸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다. 1층을 비우니 2층은 1층 같은 느낌이다. 도로에서 바로 연결되는 별도의 독립 계단도 있다. 계단을 올라서면 널찍한 테라스가 나온다. 가게에 넓은 공간을 내주고 비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이러지는 일반 상가주택과는 다르다. 대단한 풍경을 선사하지 않지만, 그 덕에 아늑한 느낌이다.
3층은 작은 규모의 테라스 두 개가 배치됐다. 4층은 루프톱처럼 천장 없이 확 트인 테라스를 자랑한다. 각 층마다 각기 다른 위치에 테라스가 나있으니, 주택은 마치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치즈덩어리처럼 보인다. 조 건축가는 “테라스 위치에 변화를 줘서 내부 평면이 층마다 각각 다르다”라며 “2층을 선호하는 사람이라도 3,4층을 가보고 업종이나 성향에 맞게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으면 했다”라고 설명했다.
5,6층은 주거공간이다. 보통 건축주가 꼭대기 층을 쓰기 마련이지만 부부는 세입자에게 6층을 내줬다. 부부는 “우리가 살고 싶은 공간이어야 다른 사람들도 살았을 때 만족감이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라며 “층마다 장ㆍ단점이 있긴 하지만 같은 곳에 살면서 주인이랍시고 꼭대기에 살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5층과 6층도 같은 크기지만 5층은 동쪽으로, 6층은 남쪽으로 테라스를 냈다. 5층의 널찍한 테라스에는 부부을 위한 텃밭도 있다. 툇마루를 원했던 부부의 요구에 맞춰 거실에 평상 같은 공간을 만들어 툇마루와 연결해뒀다. 이 공간은 단차를 높여 수납 공간으로도 활용하면서 급ㆍ배수 시설을 넣어 족욕탕도 설치했다.
서로 다른 구성의 층을 켜켜이 쌓은 집의 외관은 따뜻한 느낌이 드는 시멘트 벽돌로 마감했다. 층마다 나무 무늬가 새겨진 송판노출콘크리트가 띠처럼 둘러져 있다. 조 건축가는 “층마다 하얀 띠를 두른 듯한 오래된 인근 주택과의 통일성을 주기 위한 디자인적 의도”라며 “신축이지만 동네에 녹아들 수 있도록 되도록 오래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상가주택의 이름 '글레이어'(G + Layer)는 이 차곡차곡 쌓인 회색 층(Grey Layer)에서 따왔다.
물때 자국마저 풍경처럼 걸리는 창
상가주택 조망은 임대료 상승 요인이다. 유리 커튼월(칸막이 구실만하고 하중을 지지하지 않는 바깥벽) 시공이 일반적인 이유다. 하지만 부부의 주택은 커튼월 방식이 아닌 일정한 폭의 창들을 불규칙하게 배열해뒀다.
안에서 창을 통해 보는 풍경은 흥미롭다. 골목에 쌓인 쓰레기봉투, 철문 뒤 계단 앞에 널린 담배꽁초, 건물 뒤편에 어지럽게 달린 에어컨 실외기, 뒤엉킨 전선, 건물 외벽에 벗겨진 칠과 물 때 자국, 기와지붕을 얹은 양옥집과 목욕탕 간판 등 정돈되지 못한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생생하게 드러난다. 통창이었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법한 후미진 뒷골목 풍경인데, 가려지고 드러나면서 마치 정물화처럼 창에 걸린다.
조 건축가는 “산이나 강 같은 아름다운 자연을 끼고 있는 곳이라면 시원하게 창을 냈겠지만, 사생활도 중요하고 가리고 싶은 흔적이 가득한 주택가 이면도로라는 점을 고려해서 적당히 가리면서도 디테일을 잡아낼 수 있는 창을 구상했다"고 말했다. 평범한 풍경이라 해도 보는 높이와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점, 거꾸로 밖에서 안을 볼 때도 그렇게 보이리라는 점까지 감안했다는 설명이다. 뒷골목 풍경은 주택 안쪽까지 들어왔다. 내부는 노출콘크리트로 마감됐고, 쇳물 흐른 자국이 그대로 남은 구로강판(열연강판) 난간이 설치됐다.
부부의 상가주택은 수익만 추구하는 걸 뛰어넘으려는 시도다. 부부는 “대로변의 멋진 건축보다는 동네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런 건물을 만들고 싶었다"며 "어둡고 허름한 골목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밝고 따뜻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부가 상가주택을 짓겠다고 했을 때 주위에선 “어떻게 거기 가서 살려고 그래”라며 만류했다. 지금은 다들 “노래방이나 고깃집은 절대로 들이지 말고, 공방이나 카페처럼 사람들한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데를 찾아보라”고 권유한다. 부부는 “집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이 와서 우리와 함께 오랫동안 공간을 같이 써준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즐거운 노후가 될 것 같다”고 했다.
참, 이 상가주택엔 또 하나 특별한 점이 있다. 1층에 작은 전시실이 마련됐는데, 예술가들이 이 건물의 건축과정을 기록한 동영상을 상영하고 있다. 부부의 자부심을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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