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넷플릭스 홀릭의 등장
‘넷플릭스를 본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스페이스 포스’를 보며 낄낄거리다 이런 문구를 떠올라 순간 마음이 서늘해졌다. 넷플릭스를 끼고 살다시피 하는 요즘 생활이 과연 정상일까라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지난 3년 가량을 돌아보면 넷플릭스에 웃고, 넷플릭스에 울며 살았다. 봉준호 감독의 ‘옥자’(2017)를 집에서 먼저 영접할 수 있었고,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경이로운 흑백영화 ‘로마’(2018), 위대한(봉 감독이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언급했듯이)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의 신작 ‘아이리시맨’(2019)도 리모콘 버튼 2,3번 눌러 볼 수 있었다. 넷플릭스에서 첫 공개된 세 영화를 거실에서 보고, 이후 극장 가서 다시 보고, 그 감동의 여운을 이어가고 싶어 다시 집에서 관람했다.
대가들의 신작 영화뿐만 아니다. 미국 막장 다큐멘터리 ‘타이거 킹’ 시리즈에 눈이 팔렸고, 조선 좀비들의 습격(드라마 시리즈 ‘킹덤’)에 화들짝 놀랐다. 평생 볼 일 없을 것 같았던 스페인 드라마 시리즈 ‘종이의 집’을 알게 된 것도 넷플릭스 덕분이었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기생충’과 황금종려상을 놓고 다투다 심사위원대상(2등상)을 수상한 세네갈 영화 ‘애틀란틱스’를 발견한 곳도 넷플릭스다. 한국 개봉은 어렵겠다 생각했던 예술영화다.
넷플릭스에 빠져 살다 보니 주말 대부분 시간은 ‘집콕’이다. 평일에도 저녁 약속이 없으면 무조건 집에서 넷플릭스를 본다. 수도승처럼 ‘1일1넷’의 삶을 성실히 실천하고 있는 셈. 좀 더 큰 화면에서 넷플릭스를 즐기려고 65인치 TV를 샀다가 그걸로는 만족을 못 해 100인치 스크린과 프로젝터를 추가로 구입했다.
일상이 이 정도니 심각한 넷플릭스 중독을 의심할 수 밖에. 40대 중반 지인에게 고민하듯 중독증을 털어놓았더니 신앙간증 같은 경험담이 쏟아졌다. “저도 하루에 한번은 꼭 넷플릭스를 봐요. 1주일에 적어도 10시간 가량 보는 듯해요. 제가 좋아할 만한 한국 드라마를 귀신 같이 추천하니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너무 보고 싶었지만 결말이 비극적일 것 같아 미뤄뒀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계속 보라고 추천하더라고요. 밤에 한번 잡으면 새벽까지 죽 정주행을 해야 직성이 풀려요.”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40대 후반 김수연(가명)씨도 넷플릭스 신자다. 평일 평균 1시간 가량 넷플릭스를 시청하고, 주말엔 3~4시간을 넷플릭스 바다에 빠져 지낸다. “미드(미국 드라마)를 주로 본다”는 김씨는 “우리나라 드라마와 예능프로그램도 볼 수 있어 시청 시간이 요즘 더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넷플릭스엔 신작이 많고 추천 기능이 좋은 데다 미리 보기도 편리하다”며 “질이 좋은데 유명 감독이 연출하는 작품이 많으니 믿고 보게 된다”고 덧붙였다.
나와 지인 등이 유별난 넷플릭스 광신도일까. 최근 통계를 찾아보니 안심이 되면서도 슬쩍 무서워졌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지난 1월 발표한 ‘2019년도 방송매체 이용행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동영상온라인서비스(OTT) 이용률에서 넷플릭스는 4.9%를 차지했다. 2018년(1.3%)보다 3.6%포인트나 오른 수치다. 매달 1만원 내외를 내고 봐야 하는 유료 서비스라는 점을 감안하면 눈에 띄는 성장세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슬기로운 집콕 생활’을 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넷플릭스 이용이 급증하기도 했다. 앱 분석업체 와이즈리테일에 따르면 지난 3월 국내 이용자의 넷플릭스 결제 금액은 362억원으로 지난해 3월(167억원)보다 2배 이상 늘었다. 2년 전인 2018년 3월(34억원)보다는 10배 이상이다.
지금에야 수많은 한국인의 영혼과 일상을 뒤흔드는 ‘시간 도둑’이 됐지만 넷플릭스에게도 흑역사는 있었다. 2016년 한국에 상륙했을 때 실패를 점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카르푸나 월마트 같은 해외 유통 공룡처럼 토착화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었다. 진출 초반엔 얼추 맞아 들어갔다. 넷플릭스는 1년 사이 영상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12만명 가량까지 유료 회원 수를 늘렸으나 그 뒤 정체 상태에 빠졌다.
넷플릭스가 내민 비장의 카드는 ‘옥자’였다. 제작비 600억원 가량을 들여 만든 ‘옥자’는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는 등 화제를 불렀다. 넷플릭스는 ‘옥자’ 공개 이후 유료 회원 수를 35만명 가량까지 불렸다. ‘옥자’ 약발이 떨어지자 넷플릭스는 최소 280억원을 들여 이병헌 김태리 주연 tvN 시대극 ‘미스터 션샤인’의 판권을 확보했다. 지난해에는 1회당 제작비가 23억원인 대작 좀비 사극 ‘킹덤’을 내놓았다.
화제작을 ‘영입’할 때마다 넷플릭스 이용자는 급증했다. 방송통신업계에 따르면 올해 3월까지 넷플릭스 국내 유료 회원 수는 270만명 가량으로 추정된다. 아이디 하나로 최대 4명이 이용할 수 있는 넷플릭스의 특징을 감안하면 실제 이용자수는 650만명 가량으로 여겨진다. 지난 17일 온라인 시장조사업체 닐슨코리안클릭는 지난달 넷플릭스의 실제 이용자수가 637만4,010명이라고 발표했다. 여러 조사를 바탕으로 했을 때 넷플릭스 이용자 수는 넷플릭스가 첫 선을 보였던 4년 전보다 20배 가량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넷플릭스에 대한 열광은 한국인이 유난한 게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넷플릭스 효과’(Netflix Effectㆍ넷플릭스 때문에 미디어 환경이 바뀌는 현상), ‘빈지 뷰잉’(Binge-viewingㆍ몰아보기), ‘빈지 투자’(Binge-spendingㆍ콘텐츠에 대규모 자본을 단기간에 투자하는 것)가 횡행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지난 1분기 실적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유료 회원은 1억8,300만명이다. 1분기에만 예상치 보다 2배 가량을 웃도는 1,544만명의 신규 회원이 생겼다. 코로나19 덕이다.
넷플릭스가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집고 어떻게 한국에서도 폐인을 양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지난해 책 ‘넷플릭소노믹스’(넷플릭스 경제학이란 의미)를 내놓은 유건식 KBS 공영미디어연구소장은 “한국 콘텐츠 확보”를 꼽았다. “이미 방송된 한국 드라마를 구매하고 ‘킹덤’ 같은 새 콘텐츠를 확보하면서 이용자가 대거 몰렸다”는 분석이다. 유 소장은 “초기 화면 배치와 이용 편의성” 등도 장점으로 보았다. 과시욕도 배제할 수 없다. 유 소장은 “ ‘나랑 같이 넷플릭스 볼래?’ ‘난 넷플릭스 봐!’ 이렇게 다른 이에게 자랑하고 싶은 욕구도 이용자 증가에 한 몫 했을 것”이라고 봤다. 넷플릭스란 그물은 그렇게 우리를 더 옥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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