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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톡스 전쟁ㆍ배터리 분쟁… 한국 기업들은 왜 美 ITC 소송에 목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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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톡스 전쟁ㆍ배터리 분쟁… 한국 기업들은 왜 美 ITC 소송에 목맬까

입력
2020.07.09 04:3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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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톡스-대웅, LG화학-SK이노… 美 국제무역위 제소
‘강력한 제재·증거 확보 용이·신속한 절차’ 3대 강점
거액 비용 부담… '美산업 보호' 韓기업에 불리할 수도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국제무역위원회(ITC) 본부. 최근 국내 기업들이 지적재산권 보호 등을 위해 ITC를 찾는 경우가 늘고 있다. 위키피디아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국제무역위원회(ITC) 본부. 최근 국내 기업들이 지적재산권 보호 등을 위해 ITC를 찾는 경우가 늘고 있다. 위키피디아


기업 경영에서 경쟁사와의 충돌과 분쟁은 비일비재하다. 사안에 따라선 수 년 동안 각 사의 명운을 걸고 진행된 경우도 다반사다. 최근 보톡스 원료로 불거진  메디톡스와 대웅제약의 5년간 분쟁이나 LG화학이 SK이노베이션과 맞붙은 배터리 기술 유출 공방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국내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킨 2가지 사례 모두 미국 국제무역위원회(USITC)가 열쇠를 쥐고 있다는 부분 또한 눈에 띈다. ITC의 위상과 존재감에 이목이 쏠리는 대목이다.

핵심 기술을 비롯한 지적재산권을 사수하려는 기업에게 ITC 제소는 유용하다. 일반 소송보다 빠르고 증거 확보가 용이한 데다, 경쟁사에 강력한 제재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8일 USITC 홈페이지에 따르면 올 1분기 현재 조사가 진행된 ITC 소송은 총 90건이다. 2019년 한 해 동안 127건이 진행된 전례에 비하면 적지 않다. 2015년 88건에 머물렀던 ITC 소송은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재계는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 진출하는 우리 기업이 많아진 만큼 ITC 소송과 엮이는 경우도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ITC는 행정 집행과 사법적 판단 기능을 모두 가진 독립 기관이다. 미국에서 판매되고 있거나 공식 판매가 예정된 물품과 관련된 기업들이 불공정 경쟁에 대해 제소하면 자체 조사로 판결하고 행정명령을 내릴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미국 시장에서의 기업간 분쟁을 해결하고 불공정 경쟁을 막기 위한 기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철저하게 자국 산업과 소비자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국내 기업들은 그래서 ITC를 “가장 미국다운 기관”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최근 10년간 ITC가 진행한 연도별 조사 건수2

최근 10년간 ITC가 진행한 연도별 조사 건수2


기업들이 ITC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행정명령 권한 때문이다. 특허나 영업비밀을 침해했다고 판단되거나 미국 산업에 피해를 미칠 수 있다는 게 입증되면 수입배제 명령을 내리고 해당 물품의 미국 내 판매를 금지하거나 관세 부과까지 가능하다. 분쟁 중인 기업이 경쟁사를 압박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 생기는 셈이다.

그 만큼,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 재계 관계자는 “국내외 로펌 비용을 합쳐 한 달에 100억~150억원은 든다”며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특허권을 지레 포기해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ITC 소송의 절반가량이 판결 전 합의로 마무리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이길 경우 행정명령 권한 덕분에 실익이 크다는 점에서 기업들은 ITC 소송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쏟아 붓는다.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메디톡스와 대웅제약의 보툴리눔 톡신 의약품은 분쟁 대상이 주력 상품이기 때문에 거액을 감수할지언정 소송을 포기할 순 없었을 거라고 업계는 보고 있다.

ITC의 문을 두드리는 기업이 노리는 또 다른 부분은 증거개시(디스커버리) 제도다. 일반 법원 소송에선 지적재산권 침해나 피해 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신속하게 충분히 확보하기 쉽지 않다. 법원이 자료 제출을 요구해도 상대방이 영업비밀 등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반면 ITC에선 반드시 행정판사의 자료 요구에 응해야 한다. 또 증거를 없애거나 숨기려 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가차 없이 법적 제제가 들어가거나 패소로 이어진다. 당사자들 입장에선 공정한 조사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SK이노베이션이 지난 2월 ITC 예비판결에서 LG화학에 패소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관련 문서를 삭제했기 때문이다.

빠른 절차도 큰 장점이다. 미국 법원 소송은 제소부터 첫 심리까지 평균 2.5년이 걸리지만, ITC는 대체로 15개월 안에 조사가 끝난다. 배심원이 없어 객관적 판결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메디톡스와 대웅제약의 ITC 조사도 양사가 지정한 과학자, 소속 변호사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러나 ITC가 철저히 자국 산업을 보호한다는 점은 우리 기업에 불리하게 작용할 우려가 있다. 과거 삼성과 애플의 ITC 소송에서 삼성의 손을 들어준 ITC 결정에 대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한편에선 메디톡스가 보톡스 시장 점유율 1위인 미국 기업 엘러간과 손잡고 ITC 소송을 진행한 전략이 승기를 잡는 데 주효했다는 시각도 나온다.

강력한 제도와 전문인력으로 무장한 ITC에 우리 기업들이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건 쉽지 않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협회나 공공기관 등을 통해 해외 업무 경험이 많은 로펌의 도움을 원활하게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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