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최저임금 인상률 1.5% 역대 최저
임금 많이 올리면 오히려 일자리 위협
정부측 판단 힘실린 공익위원측의 결정
내년도 최저임금이 시간당 8,720원으로 결정됐다. 올해 대비 1.5%(130원) 오른 것으로 역사상 최저 인상률이다. 1998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보다 낮은 수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고용 한파'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가 지난해(2.8% 인상)에 이어 올해도 최저임금을 역대 최저 수준으로 인상하면서, 문재인 정부는 당초 공약보다 2년 늦은 임기 내(2022년)에도 최저임금 1만원을 달성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최저임금 결정 과정은 올해도 순탄치 않았다. 법정 시한(6월 29일)을 한참 넘긴 14일 새벽까지 의견을 좁히지 못했고, 결국 공익위원 측에서 제시한 안이 투표에 부쳐졌다. 근로자위원 전원(9명)이 불참한 채, 노사 모두 만족하지 못한 정부안으로 결정됐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이날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에서 열린 9차 전원회의에서 공익위원 안을 표결에 부쳐, 2021년 적용할 최저임금을 올해(8,590원)보다 1.5% 올린 8,720원(시급)으로 의결했다. 월급으로 환산하면 182만2,480원(월 209시간 기준)으로, 올해 대비 2만7,170원 인상된다. 근로자위원 9명 전원, 사용자위원 2명이 불참해 16명의 위원이 참여한 표결에서 9명 찬성, 7명 반대로 해당 안이 통과됐다. 공익위원들은 최저임금 인상안의 근거로 △2020년 경제성장률 전망(0.1%) △2020년 소비자물가상승률 전망(0.4%) △근로자 생계비 개선분(1.0%)을 제시했다.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아 급여가 오르게 될 근로자는 93만~408만명으로 추정된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외환위기 때보다 인상률이 낮다는 지적에 “최저임금의 인상률 절대 값을 갖고 두 시기를 표면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오판 가능성이 있다”며 “20년 전과 지금은 저임금 노동자 수, 최저임금 인상 속도 등 노동시장 환경이 굉장히 다르다”고 설명했다. 인상률을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공익위원 간사인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도 “역대 최저 인상률은 맞지만 이미 최저임금 규모는 훨씬 커져 예전에는 '야구공'이었다면 지금은 '농구공'”이라고 강조했다.
"최저임금 인상, 저임금 일자리 위협”
공익위원들은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저임금 근로자의 일자리를 줄이는 '역효과'를 우려한 것으로 나타났다. 편의점 등 소상공인, 영세자영업자를 중심으로 최저임금에 부담을 느껴 고용 규모를 줄이고 있다는 경영계의 목소리를 대체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번 결정의 배경엔 임금 인상보다 사용자측의 고용 여건을 보살펴 경제를 살려보겠다는 취지가 깔린 셈이다.
권순원 교수는 "공익위원들이 현장에 나가 (최저임금 인상에 따라) 일종의 시간 쪼개기, 초단시간 근로, 15시간 미만 일자리나 고용원이 있는 자영업자가 가족 경영 체제로 전환하는 사례를 많이 목격했다"며 "감염병 국면에서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기업의 대응 방식은 일자리를 위협할 정도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통계청이 지난 1월 발표한 2019년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고용원 없는 자영업자는 8만1,000명 증가했으나, 고용원 있는 자영업자는 11만4,000명 줄었다. 이는 외환위기 때인 1998년(24만7,000명) 이후 가장 큰 감소 폭이다.
김낙년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저임금제가 일자리를 줄이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입장이 엇갈리지만 최근에는 최저임금 인상이 고용을 줄인다는 연구 결과가 늘어나는 추세”라며 “특히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높고, 대외 수출 비중이 커 최저임금 인상에 영향이 큰 편”이라고 설명했다.
노동계에서는 그러나 저임금 노동자의 최후 보루인 최저임금 인상이 사실상 무산됐다며 크게 반발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공약이었던 1만원 달성은커녕, 2년째 역대 최저 수준의 인상률을 기록해 과거 보수 정부 때와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한다. 이번 결정으로 문 정부 4년(2018~2021년) 동안 최저임금 연평균 인상률은 7.7%에 그쳐, 결과적으로 박근혜 정부(2014~2017년) 때인 7.4%와 비슷하게 됐다.
특히 2018년 정기상여금, 복리후생비가 최저임금 산입 범위에 포함되도록 최저임금법이 개정된 탓에, 1%대의 인상률은 '동결'에 가깝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성희 고려대 노동대학원 교수는 “산입 범위 조정으로 최저임금 인상분이 차감되는 효과가 있다”며 “아르바이트나 중소기업 노동자는 상관 없겠지만 식비, 교통비 등의 복리후생비를 받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1.5% 인상 효과도 누리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퇴장, 퇴장 끝에… '졸속'으로 진행된 최저임금
최저임금 결정 과정은 올해도 난항의 연속이었다. 경영계가 ‘삭감안’을 제시한 데 반발해, 민주노총 추천 근로자위원은 마지막 전원회의장에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한국노총 추천 근로자위원은 1%대의 인상안에 항의하며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다. 노사정이 한 자리에 모여 합의를 이뤄낸다는 최저임금위원회의 취지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1988년 최저임금제도 도입 이래 최저임금이 표결 없이 ‘합의’로 결정된 것은 7번에 불과하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저임금 1만원과 같은 명목적인 수치에 매달리다 보면 협상에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공익위원을 중심으로 명목적인 수치가 아닌 실질적인 경제 흐름을 반영할 수 있는 분석 체계를 갖추고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공익위원 9명 중 5명이 어느 쪽에 손을 드냐에 따라 최저임금이 결정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며 “공익위원을 모두 정부가 임명하기 보다는 여야 추천을 통해 구성해야 정부 성향에 따라 인상 정도가 달라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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