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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 정치인 죽음을 미화하는 분위기 바뀌어야 한다"

입력
2020.07.22 01: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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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박원순 서울시장 극단적 선택
죽었다고 의혹 유야무야 곤란 진상규명 필요?
"박 시장 지지자들도 피해자 아픔 공감해야"
정치권은 죽음까지도 진영 싸움 도구로 사용

편집자주

이슈와 화젯거리를 이야기할 때 기성세대는 자주 핏대를 세웁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밀레니얼 세대는 의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견 표출의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한국일보 인턴기자들이 기성세대와는 다른 밀레니얼의 시각을 담아 한국 사회를 ‘언박싱’ 해보겠습니다. 밀레니얼의 솔직한 체감지수를 느껴 보세요.

지난 13일 오전 박원순 서울시장의 위패와 영정을 든 사람들이 서울시청에서 영결식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 13일 오전 박원순 서울시장의 위패와 영정을 든 사람들이 서울시청에서 영결식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뉴시스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9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박 시장의 갑작스런 죽음도 충격이었지만, 그에게 4년간 성추행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절규를 들으며, 사람들은 더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여성인권을 대변해온 인권변호사 출신이란 점에서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과 이별했을 뿐이지만, 남은 사람들에게는 큰 숙제를 남겼습니다. 그를 지지했든, 지지하지 않았든 말입니다.

박 시장의 죽음 이후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여권 인사들이 보여준 태도에 참담함을 느끼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평소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해온 그들이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죠. 진영 논리에 파묻혀 피해자 보호가 뒷전으로 밀리는 모습을 보면, 정치권의 젠더 감수성은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박 시장의 죽음과 이후 상황을 보면 유명 정치인의 죽음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온갖 의미 부여와 해석, 추측과 논란으로 뒤섞인 여론을 보면, 한가지 관점으로만 재단할 사안이 아니라는 거죠. 고인에 대한 지나친 추모는 의혹 확산을 막기 위한 시도로 보이고, 죽음의 원인을 둘러싼 논란에는 다양한 정치적 해석이 가해지고 있습니다. 박 시장의 죽음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던 밀레니얼에게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한국일보 인턴기자들이 언박싱해보겠습니다.


박원순 죽음이 안타깝다고? 갑론을박

숭례문 너굴맨(너굴)=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잖아.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너무 놀랐어. 그런데 그가 성폭력 가해자라는 사실에 100배는 더 놀랐어. 그가 세상과 이별한 지 열흘이 넘었는데, 지금까지도 추모와 진상규명을 두고 논쟁이 이어지는 걸 보면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

매우 매운 마라탕(매마)=대선 주자로까지 거론되던 인물이 이런 방식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적이 있었나. 그래도 추모와 진상규명은 구별돼야 할 것 같아. 추모는 언제든지 할 수 있잖아. 그런데 진상규명은 때를 놓치면 안 되는 거고.

연어는 차갑게(연어)=박원순 시장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개인적으론 자전거 따릉이와 반값 등록금, 제로페이 도입까지 알게 모르게 박 시장 덕을 많이 본 것 같아. 지방 출신인 내가 ‘서울 생활이 꽤 편했구나’라고 돌아보게 됐을 정도니까. 정말 실용적으로 시민들 삶을 개선한 것 같아. 그의 업적을 생각하니, 지금도 ‘박 시장이 그랬을 리가 없는데’라고 생각할 때가 있어.

기타치는 프레디머큐리(기프)=오랫동안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던 사람이잖아. ‘인권’과 ‘여성’을 강조하며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했던 사람이 성폭력을 일삼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지지자들한테는 정말 배신감이 컸을 거야.

분노 조절 잘해(분조잘)=일부 지지자들은 아직도 박 시장이 고소당한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해. 심지어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고소를 당해 억울하게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고 주장하잖아. 그런데 피해자 입장에선 이런 게 2차 가해야. 여당에서도 2차 가해가 될 수 있는 발언을 종종 하고 있잖아.

매마=2차 가해를 하는 지지자들은 진영 논리가 피해자의 입장보다 중요한 걸까. 그들이 박 시장을 좋아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해. 생전에 피해자와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그의 행보와 가치관을 좋아했다면, 좀더 신중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 것 같아. 심지어 여성인데도 피해자 입장은 고려하지 않고 박 시장 추모에만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을 보면 정말 의아했어.

너굴=박 시장의 장례를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른 것도 이해하기 힘들었어. 성범죄로 고소 당한 뒤 어떤 해명도 없이 극단적 선택을 한 사람이, 마치 서울시를 위해 헌신하다가 사망한 것처럼 포장됐잖아.

부어 먹는 깡소주(부어깡)=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울 수 있지만, 고소 내용만 보면 절대 가벼운 혐의가 아니잖아. ‘사람이 죽었으니 대충 넘어가자’는 식으로 추모만 하고 마무리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 피해자보다는 정치인의 죽음에만 너무 초점이 맞춰지는 것도 보기 안 좋고. 누구 뭐래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우선이 되야 하지 않을까.

연어=맞아. 진상규명이 되지 않는다면 피해자는 더 큰 고통 속에서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할 거야. 첫째도 피해자 중심, 둘째도 피해자 중심이 되야 해.

미래통합당 여성 정치인들이 지난 16일 대전시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도지사들의 잇따른 성추행을 규탄하고 여성단체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미래통합당 여성 정치인들이 지난 16일 대전시청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 시도지사들의 잇따른 성추행을 규탄하고 여성단체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정치인의 죽음은 정치권에 힘이 된다?

너굴=정치인의 죽음은 추모로만 끝나는 경우가 없는 것 같아. 박 시장이 사망한 다음날 백선엽 장군도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현충원 안장을 두고도 논쟁이 벌어졌잖아.

연어=백 장군은 6ㆍ25 전쟁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 계기를 마련한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은 사람이야.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항일 의병들을 토벌하는 만주국의 간도특설대에서 활동하기도 했잖아. 그래서 생전에도 늘 평가가 갈렸어.

부어깡=사망 후에도 ‘현충원에 안장해선 안 된다’는 쪽과 ‘서울현충원에 모셔야 한다’는 사람들의 주장이 맞섰잖아. 결국 대전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으로 마무리됐지만, 한 사람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첨예하게 의견충돌이 빚어진 적도 흔치 않은 것 같아 .

연어=유명인사나 정치인의 죽음에는 늘 이런저런 평가가 따르잖아. 그래서 죽을 때까지도, 그리고 죽고 나서도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아.

분조잘=맞아. 박 시장과 백 장군, 두 사람의 죽음은 정치권의 화두였어. 여야가 철저히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줬지. 죽어서도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어.

기프=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정치권에선 정말 추모하고 싶어서 추모하는 건지, 비판하고 싶어서 비판하는 건지 의구심이 들어. 정치인의 죽음을 교묘하게 진영 싸움의 도구로 쓰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정치인의 죽음을 정치적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영 논리 강화에 이용되는 게 정당화될 순 없어. 그건 진정한 의미의 추모도, 비판도 아니야.

부어깡=박 시장 죽음을 두고는 특히 여당에서 국민들의 비판을 겸허하게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정치권의 양성평등 인식이 시대에 뒤쳐지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줬잖아. 안희정 충남지사와 오거돈 부산시장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유사한 일이 반복됐잖아.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이해가 안돼.

너굴=그런데도 정치인들은 '꼬리 자르기' '내 식구 감싸기' 행태를 보였잖아.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침묵으로 이어지는 추모가 누구를 위한 추모인지 무엇을 위한 추모인지 모르겠어.

부어깡=그런데 보수 정치인들도 추한 과거는 잊어버린 채 여권을 공격하기 바쁘잖아. 자기들도 잘난 거 하나 없으면서 말이야. 야당 정치인들도 성추문 관련 스캔들이 만만치 않다는 걸 국민들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이 때다 싶어서 상대를 헐뜯는 모습이 보기 안 좋아.

박원순 서울시장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더불어민주당이 제작한 현수막이 걸려 있다. 뉴스1

박원순 서울시장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 더불어민주당이 제작한 현수막이 걸려 있다. 뉴스1


극단적 선택, 왜 반복되는 걸까

매마=정치인의 비극적 선택을 처음 보는 건 아니잖아.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2018년 노회찬 전 의원도 큰 충격을 안기고 떠났잖아.

너굴=전직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했을 때 정말로 믿어지지 않았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긴 했지만, 그로 인해 세상을 떠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 지금 생각해도 정말 충격적이었어.

매마=사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미화됐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사자의 명예를 훼손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치를 떨곤 했어. 그런데 박 시장의 죽음을 보니 ‘정치인 자살’에 대해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봐.

부어깡=노 전 대통령과 박 시장 죽음의 차이는 피해자의 존재 여부인 것 같아. 노 전 대통령 죽음에 얽혀있던 의혹은 뇌물수수에 관한 거였잖아. 물론 그것도 피해자가 없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번 사안은 피해자가 특정됐잖아. 그래서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엇갈리는 것 같아.

분조잘=시민들 분노의 강도도 조금 다른 것 같아. 위력에 의한 성폭력 혐의는 심각성이 직관적으로 다가오잖아. 특히 여성 인권에 목소리를 냈던 사람이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게 위선적으로 느껴지니까.

매마=그렇다고 극단적 선택이 탈출구가 되면 안돼. 책임질 수 없거나 명성에 흠이 가는 행위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 해명하거나 죗값을 치르면 되잖아. 그게 피해자를 위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어. 죽음은 상황을 끝내기 위한 무책임한 선택으로밖에 안 보여.

기프=일각에선 죽음이 가장 큰 형벌이니까 죽음으로 사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던데, 사죄는 피해자한테 하는 거잖아. 피해자가 가해자의 극단적 선택을 사죄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매마=유서에는 피해자에게 미안하다는 언급조차 없었어. 죽음을 선택하면서도 피해자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생각해.

너굴=한편으론 가해자의 일방적 죽음이 피해자에게 다른 형태의 피해를 안겨줄까 걱정이야. ‘너 때문에 멀쩡한 사람이 죽은 거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잫아. 극단적 선택은 피해자를 괴롭히는 또 다른 폭력인 것 같아.


죽음이 면제부 수단 될 순 없어

너굴=정치인이 죽으면 추모하고 칭송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의혹이 있다면 이를 명확히 밝히는 게 먼저라고 생각해. 정치인이 권력을 휘둘러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줬는데도, 유야무야 이를 덮고 갈 수는 없다는 거지.

기프=정치인이 그 자리까지 올라가면서 인생의 무게를 몰랐을까. 수많은 공인이 모범이 되지 못한 행동을 할 때 비판받는 모습을 지켜봤을텐데… 죽음이 모든 책임을 면제해주는 수단이 되면 안 된다는 거지.

연어=극단적 선택은 정치인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해. 유권자들이 그에게 부여한 책임과 권한을 내버린 것과 마찬가지잖아.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정치인에게 후한 평가를 내릴 수는 없는 거잖아.

분조잘=우리도 너무 가해자인 정치인 이야기만 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피해자가 있는데 말이야. 확실히 피해자 이야기는 매번 뒷전인 것 같아.

매마=피해자에게 사과해야 할 당사자가 없다는 게 문제지. 물질적 보상보다 진정으로 원하는 건 진심이 담긴 사과일텐데. '안전한 법정에서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다'는 피해자 입장을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마음이 아파.

분조잘=그런데 가해자가 정치권력이면, 그 피해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곳도 결국 정치권이야. 아이러니한 거지. 정치권이 가해자가 죽은 이후 편 가르기가 아니라 피해자 보호를 우선순위에 둬야 하는 이유야.

연어=박 시장 지지자들도 피해자의 아픔을 공감해줬으면 좋겠어. 박 시장을 잃은 슬픔을 피해자를 원망하는 모습으로 풀어내면 안 되잖아. 박 시장이 생전 약자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고 공감했던 것처럼. 지지자들도 무엇이 진정한 공감인지 깨달았으면 좋겠어.


정리=김예슬 인턴기자

참여=강보인, 이주현, 이태웅, 이혜인, 임수빈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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