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통일총리 헬무트 콜의 정치 덕목
편집자주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2017년 6월 16일 통일총리 헬무트 콜이 사망했다. 87세였다. 콜의 장례식은 프랑스 땅인 스트라스부르에서 거행되었다. 유럽연합 차원의 첫 장례식이었다. 콜은 ‘독일의 유럽인이면서 유럽의 독일인’으로 불리고 싶었기에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1990년 독일통일의 업적'을 쌓은 인물을 위해, 독일 땅에서는 정작 그 어떤 국가 공식 행사도 없었다. 독일 국장이 아니다보니 독일 고위 정치가들은 '상주'가 아니라 '문상객'에 불과했다. 장례와 관련된 모든 일은 콜의 부인 마이케 리히터-콜이 결정했다.
2001년 첫 부인 하넬로레와 사별한 뒤 콜은 그 전부터 연인관계였던 마이케와 2008년 결혼했다. 콜은 1930년생, 마이케는 1964년생이다. 경제학 박사였던 마이케는 콜이 아직 총리였을 때 총리실의 경제 분야 직원으로 일했다. 마이케에게 콜은 우상이었다. 마이케는 1999년 콜이 부정 정치자금 수수로 추락해 기민련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에도 그에게 존경과 애정을 보였다.
이 경우는 권력형 성범죄와는 무관하니 잠시 긴장을 풀자. 마이케는 늙고 병든 콜을 돌보며 헌신했다. 그렇지만 마이케는 콜의 주변에 장벽을 세워 콜의 옛 친구와 동지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심지어 마이케는 콜과 아들들의 접촉도 봉쇄했고 콜의 장례식에 그들이 함께 하는 것도 막았다.
마이케는 콜이 남긴 유증 자료들도 여전히 독점 보관하며 그것을 연방기록원이나 기민련 기록원에 이관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마이케는 콜의 아들들과 비방을 주고받으며 계속 분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콜의 고스트 라이터와도 법정 분쟁을 이었다. 마이케의 삶이 사별한 남편의 유지를 지키기 위한 한 여성의 외로운 투쟁인지 아니면 역사적 거물의 정치 유산을 독점하려는 악녀의 탄생인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어쨌든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의 상징인물임에도 가족사에는 큰 불화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렇지만 콜은 생애 내내 인격적 감화를 주지는 못했다. 그는 16년간 총리직을 역임했지만 독일통일이 아니었다면 1990년 이미 정치적으로 몰락했을 것이다. 1998년 권좌에서 내려온 뒤 겪은 정치자금 스캔들이나 재혼 후의 가족 분쟁이 아니더라도 콜은 자주 밉상이었다.
그는 빌리 브란트처럼 카리스마 넘치기에는 너무 옹졸했고 이기적이었다. 그는 전임자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처럼 만사에 냉정한 통찰력을 보인 현인이기보다는 늘 감정적이었고 눌변이었다. 그는 유럽의 여느 고위정치가들처럼 고상한 엘리트가 되기에는 거칠고 근천스러웠다. 그렇기에 콜은 정치 무대에 등장한 순간부터 줄곧 무시받았다. 193㎝ 150㎏에 달하는 체구는 그의 지적 둔중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경시가 오히려 콜의 출세를 도왔다. 사실 콜은 시골 출신 특유의 소박함과 뚝심으로 독일 국민들에게는 ‘평범한 우리들 중 한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었다. 콜은 그런 특성으로 권력이나 국가에 대한 오랜 신화를 순식간에 무너뜨렸고 이데올로기에 물든 정치를 인간화해버렸다.
하지만 정치가로서 콜이 지닌 장점과 덕목은 무엇보다 권력의지와 현실감각이었다. 그는 서른아홉에 이미 라인란트-팔츠주의 주지사로 등극했고 마흔 넷에 노회한 정치가들을 제치고 기민련의 당수를 차지했다. 그는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실용주의를 입에 달았다. 그는 좌파를 경멸했지만 좌파로부터 배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서독 보수 정치가들 중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가장 빨리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이가 콜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프랑스 신문 르몽드지는 콜에게서 당통을 보았다. 혁명의 위기를 맞아 당통이 “대담함, 대담함, 또 대담함”을 돌파구로 제시했던 것처럼 콜은 정치적 기로에서 항상 ‘대담’하게 행동했다.
‘역사의 외투가 스쳐 지나가면 정치가들은 그 소매 자락이라도 움켜잡아야 한다.’ 헬무트 콜이 인용한 비스마르크의 경구였다. 콜은 행동이 필요한 시기에 단호하게 행동했다. 위대한 정치가들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행동을 통해 역사를 만든다. 중간치기이자 ‘촌놈’에 불과했던 콜의 최대 장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1989년 말과 1990년 초 콜은 ‘역사의 외투 자락’을 두 번 낚아챘다. 첫 번째는 11월 말이었다. 1989년 가을, 동독 체제가 붕괴 국면으로 들어서기 전까지 콜 총리와 그의 참모들은 어떤 통일 구상이나 민족 강령을 갖고 있지 않았다. 1989년 여름과 가을 동유럽 체제가 급속한 붕괴 위기에 직면하고 동독에서도 민심 이반의 기미가 뚜렷해지며 주민들의 대량 탈출이 시작되었을 때조차 콜은 성급하게 통일 전망을 제시하기 보다는 신중하게 관망했다.
10월 말 동독의 정치 상황은 점점 더 동독 지배자들에게 불리했다. 동독의 주요 도시에서는 점차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었고 소련의 고르바초프 또한 동독 정치지도부에게 개혁을 압박했다.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상황은 가속 페달을 밟았다.
1989년 11월 중순 동독에서 드디어 혁명의 제 2국면이 전개되었다. 이제 상당수 동독 주민들은 통일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동독 주민들의 통일열망을 냉소하며 유럽통합의 무지개를 내세우는 서독 좌파들의 탈민족 전망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시점이었다.
콜은 이 불투명한 국면에서 ‘10개조 통일강령’을 제시함으로써 모든 통일 논의를 흡수하고 압도할 수 있었다. 동독 주민들에게 체제 개혁의 청사진만이 아니라 통일 전망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서독으로의 대량탈출을 억제할 수 있었고 동독 내부의 혼란과 불안을 잠재울 수 있었다. 아울러 독일민족 운명의 결정은 전적으로 독일인들에게 있음을 세계에 알린 “대담”한 선언이었다.
1989년 11월 28일 콜이 연방의회에서 발표한 ‘10개조 통일 강령’은 그 핵심이 연방국가로의 완전 통일 전에 국가연합이라는 중간단계를 설정한 것이었다. 당시 콜은 10년 정도의 양독간 국가연합 단계가 필요하리라고 보았다. 그 때만 해도 그는 양독이 1~2년 내 급속하게 통일하면 엄청난 재정적, 경제적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가연합 단계에서는 아직 동독이라는 국가가 여전히 존재해야 하겠지만 이미 그것은 자유로운 선거에 의해 구성된 민주정부가 통치하는 것이기에 일정 기간 국가연합 단계는 가능하고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보았다. ‘10개조 통일강령’의 강점은 그것이 국민국가로의 재통일을 일차적 과제로 제시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럽 통합의 전망을 놓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콜은 그 10개조 통일 강령으로 급변하는 정세를 조정하고 스스로 맨 앞에 서서 향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89년 12월 후반 동독 주민들은 다시 콜보다 더 앞서 내닫기 시작했다. 콜 수상이 1989년 12월 19일 드레스덴을 찾았을 때 동독 대중들이 외친 “헬무트, 헬무트!” “독일, 통일 조국”이라는 구호, 그리고 12월 22일 브란덴부르크 문의 개방 축하 행사시 몰려든 동독 대중들이 드러낸 강력한 통일열망은 콜 수상에게 “결정적 경험”이었다.
동독의 대다수 주민들이 원하는 것이 국가연합 방식의 우회로가 아니라 지금 당장의 급속한 통일임을 확인했다. 콜은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는 한편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은 10개조 통일강령 중 핵심인 국가연합안이 사실상 폐기되어야 함을 알면서도 당장의 동독 내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동독 지도부를 대화의 상대자로 인정했다. 대신 애초 동독 지도부와 약속한 국가연합의 협상은 자유선거로 새롭게 구성될 정부와 진행할 것임을 천명하면서 급속한 통일로 방향을 틀 기회를 보았다.
1990년 1월 중순 콜은 애초의 신중한 우려와는 달리 이제 “경제적 이성”을 버리고 “정치적 이익”이라는 “대담”한 실험을 택했다. 1990년 1월 중순 콜이 급속한 흡수 통일의 전망을 제시했을 때 여타 정치 세력의 국가연합안은 통일안이라기보다는 통일을 반대하는 ‘반민족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콜은 그렇게 상황을 주도했고 결국 승리했다.
냉정하게 말하면, 콜은 동독 주민들의 물질 욕망을 자극해 자신의 정치 이익과 일치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결코 그들이 처음으로 드러낸 도덕적 신념의 의미를 받아들이거나 사회적 결속의 전망을 일깨우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이 두 번째의 대담함이 마냥 상찬 받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역사에 외투를 입혀서 나서게 하지는 못할망정 외투를 걸친 역사가 스쳐 지나가는데도 그 소매 자락을 낚아채지 못하는 수많은 정치가들과 비교하면 그는 분명 ‘거인’이었다. 21세기에는 아마도 개인사적 미담은 말할 것도 없고 지혜와 용기, 정의와 절제를 다 갖춘 정치가를 만나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다만 정치가들이 권력을 노리고 유지하려면 부디 현실의 요구와 시대의 필요에 민감해야 하고 때로 대담하게 결정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교훈은 남는다. 평화정치를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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