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수백 권의 신간이 쏟아지는 책 시장에서 1,000쪽이 넘는 벽돌책은 귀하다. 어마어마한 분량을 채우는 것부터가 웬만한 내공이 없으면 시도조차 못할 일. 평생 한 우물만 판 노학자들에게도 버거운 도전이다.
1,400쪽에 달하는 ‘중국 군벌전쟁’(미지북스)의 저자 권성욱씨는 그래서 더욱 눈에 띈다. 그는 전쟁사를 전공하지도 않았고 학계에 몸담고 있지도 않은 평범한 공무원이다. 울산시 중구청 행정지원과에서 전산 업무를 담당하는 그는 낮엔 국가와 시민에 봉사하고, 밤엔 중국 사료 연구에 매진하는 5년간의 이중생활 끝에 책을 완성했다.
권씨는 각종 무기나 전쟁사 등 군사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밀리터리 덕후(마니아)들 사이에선 유명한 무림의 고수다. 2014년 국내 최초로 중일전쟁을 다룬 역사서 ‘중일전쟁’으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주는 우수출판컨텐츠 상도 받았고, 전쟁사 관련 번역과 감수를 맡은 책만 벌써 4권에 달한다. “어린 시절 매료됐던 삼국지 덕에 전쟁사 덕후로 성공했다”는 그는 차기작으로 중국의 국공내전을 다룬 세 번째 벽돌책을 준비 중이다.
학자나 교수는 아니지만 실력은 전문가를 능가하는 '부캐(부캐릭터)’들의 활약상이 최근 출판계에서 두드러지고 있다. 본업과도, 전공과도 무관하지만 한 분야에 꽂히면 끝까지 파고드는 덕후들의 열정과 집요함 덕에 인문 교양 출판 시장의 스펙트럼은 더욱 넓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아마추어 전문가들은 주류 학계에서 다루지 않았던 담론과 시각으로 차별화를 꾀한다. 권씨가 다룬 마오쩌둥 이전 중국 근현대사의 권력다툼은 우리나라에 좀처럼 알려지지 않은 연구 분야다.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휴머니스트)의 저자 박건호씨는 본업이 역사 교사였지만 ‘생활 자료 컬렉터’란 부캐 커리어에 힘입어 책까지 냈다. 30년간 직접 수집한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피로 쓴 사직서 등 평범한 물건에서 거대 역사에 가려진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끄집어 낸다. 저자는 케이블채널 tvN의 예능교양 프로그램인 '유퀴즈온더블럭'에서 '수집 덕후' 주인공으로도 출연할 예정이다.
지난해 ‘문화유산의 두 얼굴’(글항아리)이란 책으로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 4부작을 완성한 다큐멘터리 작가 출신 조윤민씨도 손에 꼽히는 '역사 덕후'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은 “민중과 지배층의 관계를 키워드로 조선시대를 복합적으로 읽어내는 연구의 일가를 이뤘다”고 소개했다.
덕후들은 미지의 영역도 발굴하고 개척한다. ‘거대도시 서울철도’(워크룸프레스)는 전 세계 철도와 서울 철도의 모든 것을 담은 철도 백과전서로 철도 덕후들 사이에서도 '끝판왕'이란 평가를 받는 책이다. 저자는 전 세계 거대도시 50개의 철도를 분석하는 방대한 사전작업 끝에 구체적 재원조달 방안까지 담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철도망 계획을 제안한다.
웬만한 장기 국책과제보다 더 어마어마한, 건국사업에 맞먹는 일을 과감하게 던진 전현우씨의 전공은 철도와는 거리가 한참 먼 분석철학. 2005년부터 철도를 둘러싼 교통의 세계에 푹 빠져들어 이 같은 대작을 만들어 냈다. 그는 현재 서울시립대 자연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철학과 물리학의 시각으로 교통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고분자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국립과천과학관 소속 과학자이자 20년 전통 돈카츠 전문점 경영자의 사위인 임두원씨는 이론과 실무의 경험을 살려 튀김의 모든 것을 파헤치는 책 ‘튀김의 발견’(부키)을 내놨다.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에 숨겨진 과학의 원리부터, 전 세계 튀김 요리의 비화까지. 튀김이란 주제를 두고 이렇게까지 전문적일 수 있는 것인지 덕후의 힘을 새삼 느끼게 해준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는 "지적 훈련을 꾸준히 이어온 계층의 등장과 함께 편집자들의 적극적인 에디터십이 만나면서, 아마추어지만 좁고 깊게 한 분야를 파 온 덕후들의 출간은 더욱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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