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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쌓인 분노 폭발… 태국, 레드불 뺑소니 사건 ‘정권 심판론’으로 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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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간 쌓인 분노 폭발… 태국, 레드불 뺑소니 사건 ‘정권 심판론’으로 번져

입력
2020.08.0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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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원점 재수사" 시사... 진실규명 새 국면
反정부 시위 '적폐청산' 요구에 기폭제 조짐

지난달 20일 태국 방콕의 육군 본부 앞에서 시민들이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다. 방콕=AFP 연합뉴스

지난달 20일 태국 방콕의 육군 본부 앞에서 시민들이 쁘라윳 짠오차 총리의 퇴진 등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다. 방콕=AFP 연합뉴스


태국의 손꼽히는 부호이자 세계적인 스포츠음료 업체 ‘레드불(Red Bull)’ 3세가 저지른 뺑소니 사망 사건이 유전무죄 논란을 넘어 ‘정권 심판론’으로 확산되고 있다. 사건 발생 8년이 지났는데도 검찰과 경찰이 번갈아 가며 진실을 축소ㆍ은폐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국민적 분노가 폭발해 최근 번지고 있는 반(反)정부 시위의 새 기폭제가 된 것이다. 갈수록 거세지는 시위에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는 사건 재수사를 시사하는 등 여론 진화에 진땀을 흘리고 있다.

발단은 2012년 9월3일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35)가 수도 방콕 도심에서 자신의 페라리 자동차로 오토바이를 타고 근무 중이던 경찰관을 들이 받아 사망케 한 사건이다. 당시 오라윳은 피해 경찰관이 차에 매달려 있는지도 모른 채 수십m를 운전하는 등 누가 봐도 음주가 의심되는 행동을 했다. 사건 발생 직후 도주했다 체포된 그는 실제로 혈중 알코올농도가 0.065%로 측정됐다. 우리로 치면 면허정지에 해당하는 수치다. 하지만 경찰은 “스트레스로 술을 마셨다”는 가해자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해 음주운전 혐의를 모른 체 했다. 검찰 역시 과실치사 혐의만 마지못해 적용했을 뿐이다. 검찰은 이후 8번의 소환 요청에 불응한 오라윳에 대해 출국금지 조치를 하지 않는 등 오히려 그의 해외 도피를 방조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그렇게 끝나는 듯했던 사건은 지난달 26일 검찰이 오라윳의 과실치사 혐의마저 불기소 결정을 내리면서 제대로 폭발했다. 여러 시민단체와 대학생, 야권이 일제히 부실ㆍ봐주기 수사를 지적했고, 하원도 검찰총장 소환을 추진했다. 일반 시민들 역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레드불을 보이콧하라(#BoycottRedbull)’ 등의 해시태그를 퍼뜨리며 정권 비판에 힘을 실었다. 사건 당시 오라윳의 코카인 복용 여부를 수사해달라는 의뢰도 잇따랐다. 최근에는 중ㆍ고교생들까지 단죄 요구 목소리에 가세했다.


쁘라윳 짠오차(가운데) 태국 총리가 지난달 28일 방콕에서 열린 국왕 생일 기념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방콕=EPA 연합뉴스

쁘라윳 짠오차(가운데) 태국 총리가 지난달 28일 방콕에서 열린 국왕 생일 기념 행사장에 입장하고 있다. 방콕=EPA 연합뉴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태국 정부는 이제서야 각종 수습책을 내놓으며 국민 설득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쁘라윳 총리는 검찰 발표 직후 총리실 직속으로 진상위원회를 꾸린 데 이어 4일 “사건을 원점에서 재수사할 수 있는지 검토하라”고 진상위에 지시했다. 진상위 역시 이날 중간 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사고 당시 정황과 관련된 과학적 증거가 남아 있고, 오라윳의 코카인 복용 정황도 나타났다"며 "경찰에 재수사를 권고하겠다"고 화답했다.

태국 정부가 잔뜩 긴장한 것은 대학생과 시민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지난달 18일부터 시작된 정권퇴진 시위에 오라윳 사건이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을 조짐이 확연하기 때문이다. 2,500명이 참가해 2014년 군사 쿠데타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진행 중인 이번 반정부 시위는 권력기관의 ‘적폐청산’이 최대 화두다. 8년 동안 제대로 된 처벌을 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가 검경의 봐주기 수사인 만큼 시위 주제와 딱 들어맞는 셈이다. 거꾸로 정부가 국민 눈높이에 부합하는 해법을 내놓지 못할 경우 시위의 칼날이 어디까지 향할지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진실 규명의 핵심은 뺑소니 당시 오라윳 차량이 과속(177㎞)으로 달리다 오토바이를 먼저 들이 받았는지, 아니면 정상 속도(80㎞ 이하)로 가던 차량 앞으로 오토바이가 끼어들었는지 여부다. 전자는 경찰의 최초 수사 결과이며, 후자는 검찰이 오라윳을 불기소할 때 제시한 근거다. 피의자 코카인 복용 의혹도 규명 대상이다. 오라윳 측은 “치과 치료 과정에 마약 성분이 들어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말을 곧이 믿는 태국인은 거의 없다. 태국 치과협회도 “이 치료에 마약이 사용된 것은 100년도 넘은 일”이라며 황당하다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오라윳 측 핵심 증인이 최근 돌연 사망한 것도 의혹을 더하고 있다. 2018년 갑자기 나타나 “내가 오라윳 차 뒤에서 운전을 했다”며 검찰 측 불기소 결정에 힘을 보탠 짜루맛 맛통(40)은 진상위가 구성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지난달 30일 교통사고로 숨졌다. 현지에선 △사망 시점이 공교롭다는 점 △가해자가 계속 진술을 번복하고 있는 점 △짜루맛의 휴대폰 유심칩이 사라진 점 등을 들며 “오라윳 측이 증인의 변심을 우려해 사고사로 위장해 살해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퍼지고 있다. 치앙마이 경찰도 살해 가능성을 열어놓고 수사 중이다.


2017년 4월 과실치사 혐의를 받고 있는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가 영국 런던의 한 집에서 나와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2017년 4월 과실치사 혐의를 받고 있는 레드불 창업주의 손자 오라윳 유위티야가 영국 런던의 한 집에서 나와 차량으로 이동하고 있다. 런던=AP 연합뉴스


하노이= 정재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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