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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듯 거짓말' 연쇄 살인범… 함정 질문으로 자백 끌어내다

입력
2020.08.17 04:30
수정
2020.08.17 15:19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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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의 첨병, 프로파일러의 세계]? <2> 의정부 여자친구 연쇄살인 사건

2018년 4월 12일 경찰이 경기 포천시의 한 야산에서 여자친구 살해 암매장 사건의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붉은색 동그라미가 피의자의 모습. 의정부경찰서 제공

2018년 4월 12일 경찰이 경기 포천시의 한 야산에서 여자친구 살해 암매장 사건의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붉은색 동그라미가 피의자의 모습. 의정부경찰서 제공



편집자주

범죄 드라마나 영화에서 '초능력자'처럼 등장해 범죄자의 감정선을 무너뜨리는 프로파일러. 그러나 실제 프로파일러는 끊임없이 범죄자 심리나 행동패턴을 분석해 범행의 이유를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합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월요일마다 범죄 현장 뒤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프로파일러의 세계를 조명합니다.


“딸과 연락이 안 돼요. 제발 제 딸을 찾아주세요.”

2017년 11월 19일 경기 의정부경찰서에 중년 여성 한 명이 다급히 찾아왔다. 여성은 두 달 전부터 딸 신모(당시 21)씨와 연락이 끊겼다며 실종 신고를 접수했다. 딸 신씨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이사해 독립했다. 어머니와 자주 연락을 주고 받지는 않았지만, 이번처럼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적은 없었다.

즉각 실종 사건 수사에 착수한 의정부서는 신씨가 이미 넉 달 전부터 휴대폰ㆍ신용카드를 사용하지 않는 등 수상한 대목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사건을 보고 받은 경기북부청은 단순 실종 사건이 아니라고 판단, 즉각 이일호 프로파일러(경사)를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의정부 여자친구 연쇄살인' 사건에 대한 본격 수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한 달 간 용의자 자료 분석… 뒤죽박죽 속 일관성 찾기

2016년에 막 입사한 신입 프로파일러에겐 상당히 까다로운 사건이었다. 이 경사는 “보통은 수사가 안 풀리는 단계에 프로파일러가 투입되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사건은 제가 맡은 사건 중 처음으로 첫 발생부터 투입된 사례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실종자 신씨의 통신자료ㆍ이동경로 등을 전달받은 이 경사는 수사팀과 함께 신씨의 마지막 행적을 추적했다. 2017년 7월 13일 신씨는 본인 명의로 렌트카를 빌린 뒤 경기 포천시 한 야산을 방문한 이후 행적이 묘연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됐다. 신씨가 빌렸던 렌트카가 반납될 당시, 반납자 명부에는 신씨가 아닌 남성 최모(당시 30)씨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당시 최씨의 행적 또한 신씨와 일치했다.

최씨의 행적을 추적하던 경찰은 매우 의외의 장소에서 최씨를 발견했다. 그는 이미 또다른 여자친구 김모(당시 22)씨를 살해한 혐의로 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 경사는 남자친구 최씨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성장과정, 가정환경, 교우관계, 범죄전력까지 최씨와 관련된 모든 서류를 한 달에 걸쳐 밤낮없이 살폈다. 용의자의 과거에서 일관성을 발견해 범행 가능성을 평가하는 것이 바로 프로파일러가 해야 할 일이었다.

“범행 가능성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일관성’입니다. 프로파일러가 어떤 용의자에게 꽂혔다고 해서 자기 입맛대로 과거 행적들을 가져와선 안 돼요. 뒤죽박죽 나열된 과거 흔적들을 보면서 최씨라는 인물을 형상화하고, 행동의 일관성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일호 프로파일러

이 경사가 프로파일링을 통해 분석한 최씨의 가장 일관된 특성은 ‘충동성’이었다. 말다툼 끝에 김씨를 목 졸라 살해했고, 사흘 뒤 모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시도했던 점 등이 충동성을 보여준 대표적 행동이었다. 범행을 숨기기 위해 김씨 휴대폰으로 유가족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사망한 김씨의 카드를 사용한 점 또한 최씨의 충동적 성향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여기에 더해 △과거 최씨가 전투경찰로 복무할 때 근무지 이탈로 처벌받은 전력 △도박을 즐겨했다는 주변인 진술 △수입에 비해 과분한 고급 외제차 선호 성향 등은 충동적 범행의 가능성을 뒷받침 해주는 요인들로 평가됐다.


2017년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시신을 경기 포천시의 한 야산 암매장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최모씨는 평소 자신의 페이스북에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등 고가의 고급 외제차 차량의 사진을 게시했다. 최모씨 페이스북 캡처

2017년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시신을 경기 포천시의 한 야산 암매장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최모씨는 평소 자신의 페이스북에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 등 고가의 고급 외제차 차량의 사진을 게시했다. 최모씨 페이스북 캡처



살인자 심리 특성 추정해 암매장 위치 예상

최씨가 신씨를 살해했다는 정황이 짙어진 이상, 신씨의 시신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그러나 단서가 부족했기 때문에 최씨가 시신을 옮겼는지, 사건 현장에 암매장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경사는 일단 수사관에게 전달받은 렌트카 위치확인정보시스템(GPS) 분석에 착수했다. GPS에는 렌트카의 동선과 체류시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경사는 “동선을 평가했을 때 최씨의 상태가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며 "무언가에 쫒기듯 야산 주위를 바쁘게 움직이고 시내를 들락날락 하는 모습이 그려졌다”고 말했다.

이 경사는 수차례 현장을 답사하고, 온라인 ‘로드뷰'(실제 사진을 바탕으로 한 지도)를 통해 최씨 동선을 따라간 끝에 렌트카가 특정 장소에만 머무른다는 점을 발견했다. 야산을 방문했을 때의 동선은 굉장히 복잡했지만, 시내로 돌아와 머문 곳은 대부분 세차장이었다. 이 경사는 “불안한 동선을 보여주던 렌트카가 왜 그 시간에 세차장에서 멈췄을까를 생각해봐야 한다”며 "무언가를 청소할 장소를 찾으러 다닌 것이라면 그 이후 세차의 의미는 달라진다”고 분석했다. 실제 최씨는 신씨를 살해한 뒤 차량 내부를 스팀세차한 후 업체에 반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최씨가 사건 직후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야산을 맴돌고 곧장 세차장을 찾았다는 점에서 암매장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제 문제는 시신을 유기한 정확한 지점을 찾는 것. 이 경사와 수사팀은 GPS를 바탕으로 포천시 야산 인근을 샅샅이 살펴봤다. △야산이지만 차량이 드나들 수 있는 곳 △인적이 드문 곳 △살해 시간을 벌기 위해 주차가 가능한 곳 등을 고려해 장소를 특정했다.

암매장 장소를 대략 특정했지만 이 경사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수색팀 효율을 높이려면 수색 범위를 더 좁혀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최씨가 몰던 차량을 기준으로 암장 장소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를 두고 수사팀은 고민에 빠졌다. 왼쪽은 평평했지만 수풀이 우거진 곳이고, 오른쪽은 가파른 경사가 있었다. 수색 당시는 겨울이었지만 살해 당시 계절은 한여름이었다.

“처음엔 왼쪽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최씨의 관점에서 본다면, 가장 중요한 건 ‘불안감’이었어요. 인간은 불안을 느끼면 벗어나려고 하는데 사람을 죽일 정도라면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일호 프로파일러

불안감에 휩싸인 용의자라면, 남들 눈에 자신이 안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야를 확보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안정감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게다가 암매장 할 수 있는 공간을 파내려면 왼쪽 평지를 수직으로 파내는 것보다 오른쪽의 경사면을 파는 게 더 수월하다.

이런 추리 끝에, 피해자 신씨의 마지막 행적이 잡힌 지 8개월이 지난 2018년 3월 13일 드디어 경찰은 렌트카가 있던 오른쪽 장소에서 신씨 시신을 발견했다. 시신은 백골화가 진행된 상태였지만 실종 당시 입었던 옷가지 등은 그대로 남았다. 사인은 망치 가격으로 인한 머리 손상이었다.

거짓말 예상하고 질문… 궁지 몰린 용의자의 실토

이제는 용의자 최씨의 자백을 이끌어 내야 하는 상황. 이 경사는 용의자 범행 가능성 평가 당시 모았던 최씨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심문 전략을 구성했다. 최씨가 이미 김씨 살해 혐의로 구속 수감된 상태라, 매번 체포영장을 발부받아야 조사가 가능한 만큼 최대한 집중적이고 효율적인 신문 전략을 마련해야 했다.

“사이코 패스 체크리스트라 불리는 정신병질자 평가척도(PCL-R)를 보면, 최씨는 여러 항목에 해당했지만 특히 ‘4번 병적인 거짓말’에 적합했죠. 이런 형태의 용의자에겐 일부러 거짓말을 하도록 유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일호 프로파일러

최씨는 수사 초기단계부터 수차례 밥먹듯이 거짓말을 해 수사에 애를 먹였다. 수사팀이 조사를 위해 구치소 접견을 신청하면 ‘조사를 받겠다’고 얘기해 놓고 막상 접견을 거부해 헛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변호사까지 속여 제3자가 신씨를 살해했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수사기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이 경사가 선택한 심문 전략은 ‘자유서술형’이었다. 예를 들어 ‘2017년 7월 13일 야산을 갔느냐’고 구체적으로 질문하기 보다는 ‘2017년 7월 13일에 무엇을 했느냐’고 포괄적으로 질문하는 식이다.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일부러 열어두는 기법이다. 최씨가 ‘신씨를 만나긴 했는데 금방 헤어졌다’고 거짓 진술할 경우, 함께 있었다는 증거 자료를 제시해 최씨를 압박할 수 있었다. 이 경사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들통났을 경우엔 압박감이 상당하기 때문에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결국 진실을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결국 이 경사의 신문 전략에 도움을 받아 수사팀은 최씨의 살해 자백을 이끌어냈다. 최씨는 여자친구 신씨가 자신의 전 여자친구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신씨를 살해했다고 털어놓았다. 이 경사가 애초 분석했던 최씨의 '충동적 특성'이 재차 확인된 셈이다.

빼곡히 적힌 수사자료 덕 무기징역 이끌어

2018년 10월 5일 김씨와 신씨 살해 혐의 등으로 기소된 최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판결문에는 세 쪽에 걸쳐 이 경사와 수사팀이 함께 작성한 수사 자료가 빼곡히 담겨, 최씨의 범행을 입증해줬다. 재판부는 "피해자들은 피고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거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20대 초반의 여성들이었다”며 "피고인이 자신들을 해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한 채 황망하게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고 최씨를 질타했다. 2019년 7월 11일 대법원은 최씨의 상고를 기각하고 무기징역형을 확정했다.

김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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