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서독 좌파 민족론
편집자주
2020년은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6ㆍ15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분단의 비극은 북핵 위험으로 더 증폭된 듯 하다. 이동기 강릉원주대 사학과 교수가 독일 경험을 통해 한반도 평화의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글을 격주 월요일 ‘한국일보’에서 연재한다
195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 모리악은 1966년 “저는 독일을 사랑합니다. 독일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그것이 둘인 것이 매우 기쁩니다”고 말해 독일인들을 놀라게 했다. 1년 뒤 서독 주간지 '슈피겔' 기자가 따져 물었을 때 모리악은 “농담이었어요”라고 달랬다. 드골을 찬양했던 프랑스 보수주의자 모리악은 독일 음악과 문학을 높이 올리면서도 끝내 독일의 민족주의 재등장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지 않았다.
양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던 이웃 유럽 주민들의 공포와 우려는 독일인들의 국가관과 민족관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나는 국가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내 아내를 사랑하지요!” 1969년 사회민주당 출신으론 처음 연방대통령에 당선된 구스타프 하이네만은 “연방공화국(서독 국가)을 사랑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대통령이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는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그 뒤에도 서독 여론사회에서는 ‘간단치 않은 조국’에 대한 불편함이 다양하게 표현됐다. 국기를 게양하며 엄숙한 표정을 짓거나 국가를 제창하며 비장해하는 의례는 의심스럽거나 우스꽝스러운 일에 불과했다. 아내든 남편이든 멋져도 오래되면 사랑하기가 쉽지 않은데 폭력을 독점한 채 겁만 주고 폼만 잡는 국가 따위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 서독의 비판적 지식인들과 젊은 세대에게 국가는 사랑이나 충성의 대상이 아니라 비판과 변혁의 과제였다. 국가가 ‘민족’을 내세워 가공할 범죄를 저질러 놓고는 그것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다시 민족의 영광이나 국가의 위용을 자랑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1970년대와 80년대 서독 주류 사회와 상당수 주민들은 민족은커녕 국가에 대한 애정도 자기 검열했다. 한편으로 그들은 나치즘과 홀로코스트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며 민족사를 성찰했다. 혈통이나 전통은 위험한 것으로 경계해야 하고 문화나 역사도 조심스럽게 살펴야 하는 것이지 오만하게 민족 존속의 근거라고 내세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보기에, 독일 분단은 홀로코스트의 징벌로서 받아들여야 했다. 독일이 다시 민족이나 통일을 내세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서독의 비판적 자유주의자들, 사민당과 녹색당의 정치가들은 분단국가인 서독 사회에 이미 서독사람이라는 분단국 정체성이 민족 정체성, 즉 독일민족 의식을 능가했음을 발견했다. 서독인들은 평화정치를 통해 동독인들과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민족동질성’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인지를 더욱 확인했다. 1970년대 이래 단일한 독일민족의 존재나 지속을 부정하는 논의가 거셌다. 이를테면 서독의 대표적 비판 역사가 한스 몸젠은 분단에도 불구하고 독일민족이 지속되고 있다는 주장과 독일 전체를 아우르는 민족의식이 존재한다는 식의 ‘재민족화’ 경향은 서독 주민, 특히 청년 세대들의 비판적 역사상과 조응하지 못한 낡은 집착임을 강조했다. 그는 서독과 동독 모두에서 이미 비스마르크식의 국민국가 전통이 종결됐음을 지적했다. 민족이 아니라 현실로 존재하는 분단국 서독이 중요했다.
이때 서독 정체성이란 국가의 업적에 대한 자긍심도 아니었고 서독 국가기구에 대한 복종이나 성문 헌법인 기본법에 대한 충성 서약 같은 것은 더욱 아니었다. 민족의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현실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구성되는 집단적 성찰 문화가 서독 정체성의 내용이었다. 사민당 내 다수파와 녹색당의 정치가들은 독일 분단을 나치 독재와 홀로코스트의 ‘정당한 징벌’로 간주했으며. 독일과 유럽의 평화 정착은 독일 분단을 국민국가 방식으로 극복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일 내 두 개의 국가가 그대로 존속한 상태에서 새로운 통합유럽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특히 1989년 사민당의 새 지도자로 부상한 오스카 라퐁텐으로 대표되는 사민당 내 탈(post)-민족 지향의 정치가들에게 ‘독일민족’이란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동독을 국제법적으로 완전히 승인할 뿐 아니라 동독주민을 서독과는 완전히 다른 국민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989~1990년 겨울 독일 통일을 둘러싼 정치 논쟁 국면에서 사민당은 ‘통일되지 않은 채 통일’로 휩쓸려 들어갔다. 당시 사민당 당수이자 원내총무였던 한스 요헨 포겔과 빌리 브란트 등은 헬무트 콜의 애초 통일구상, 즉 국가연합을 통한 연방국가로의 독일 통일 및 통일독일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ㆍ나토) 잔류 그리고 곧 1990년 1월 중순 그 구상의 변화, 다시 말해 국가연합 단계의 포기를 통한 급속한 통일 추진 등에 모두 동의했다.
이에 반해 좀 더 젊거나 더 좌파적인 다수의 사민당 정치지도자들, 특히 라퐁텐을 비롯한 '브란트의 손자들'과 녹색당 정치가들은 유럽 통합을 통한 분단 극복 전망의 해결책을 고수했다. 그들은 이미 현실 정치 일정으로 들어선 독일 통일 자체를 거부하거나 최대한 유예시키면서 유럽 통합을 통한 독일 문제 해결 또는 이중적 국가연합, 즉 독일국가연합과 유럽국가연합을 통해 독일 통일과 유럽 통일을 동시에 병행해서 발전시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하버마스와 귄터 그라스를 비롯한 상당수 좌파 지식인들이 연이어 성명과 의견을 제출하며 국민국가로의 급속한 재통일이 초래할 사회 문제와 ‘민족주의화’의 위험성을 부각시키면서 그 노선을 지지했다.
1989년 12월 중순 베를린에서 열린 사민당 당대회에서 대의원들은 민족 통일을 우선시하는 당 명예대표 브란트와 유럽 통합 지향의 차기 사민당 총리후보자 라퐁텐 두 사람의 연설에 같은 정도로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통일 문제를 둘러싼 사민당의 결속이 아니라 당시 예기치 않은 통일국면에서 사민당 당원들이 가졌던 불안과 혼란을 드러냈을 뿐이다. 1990년 3월 18일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동독 주민들은 원래의 선거 예상과는 달리 서독 사민당의 지원을 받은 동독 사민당에게 단지 21.9%의 지지만을 보여줬을 뿐이었다. 동독 주민들은 선거에서 콜의 통일 노선을 지지하며 급속한 흡수통일을 승인했다. 상황이 이렇게 냉혹함에도 불구하고 사민당의 차기 총리 후보로 등장한 라퐁텐은 여전히 이전의 입장을 유지하며 통일열차에 합승하지 못했다. 결국 사민당은 통일 국면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대가를 그해 12월 초 연방의회 총선에서의 ‘역사적 참패’를 통해 지불하게 된다. 사민당은 33.46%의 지지로 전후 최악의 선거 결과를 경험했다.
서독 좌파 지식인과 정치가들의 착오는 서독과는 달리 동독에서는 분단 시기 내내 동독정체성이 형성되지 못했고 오히려 독일민족 의식과 통일 갈망이 강했음을 보지 못한 것이다. 성급한 두 개의 민족 테제 주장이 지닌 한계였다. 하지만 그들이 정확히 포착한 것은 서독에서는 실제로 분단국 서독 정체성이 독일민족 정체성보다 더 강했다는 사실이다. 서독 주민들은 통일 후에도 동독 사회나 주민들에게 어떤 적극적인 관심도 없었다. 그들의 무관심과 냉소는 동독인들의 불만과 대항 의식을 낳았다. 통일 후에 오히려 동독 정체성이 등장하는 기괴한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서독 좌파들의 진단과 우려는 단순히 역사의 에피소드가 아니었다.
더구나 서독 좌파들이 그렇게나 매달렸던 비판과 성찰의 국가관이 아니었다면 독일은 유럽 주변국의 우려를 끝내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과거사 정리를 통한 자국사에 대한 비판의식과 민주주의 정치문화를 통한 탈권위적 국가 이해는 통일 과정의 배음으로 독일인들의 민족 함성을 조용히 뒤따랐다. 그것은 역사의 주요 국면에서 묻힌 소리였지만 통일 후 곧 평화의 기음으로 전환된다.
한반도 남쪽과 북쪽에서도 분단국 정체성과 민족의식이 혼재하고 있다. 2019년 북한의 김정은 신년사를 통해 ‘우리국가 제일주의’를 천명했고, 남쪽의 일부 세대와 주민 집단에서는 이미 수년 째 ‘대~한민국’ 정체성이 뚜렷이 성장하고 있다. 여전히 인습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내세워 인위적 민족 정체성을 강제할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성급히 ‘양국체제’나 두 개의 민족론을 깃발로 들 일도 아니다. 주장과 당위가 아니라 관찰과 분석이 먼저다. 민족이든 국가든 둘 다 구성원들의 삶과 지향의 다원적 결을 찾고 잇는 의지 공동체다. 그것은 매일매일 사회구성원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새롭게 소통하고 연결하는 작업이다. 그것을 평화라고도 부른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