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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끝나면 옛날이 남지만 우정이 끝나면 무엇이 남을까

입력
2020.08.12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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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좋은 친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편집자주

독창적 문체로 남성 패션지 ‘GQ’를 18년간 이끌어온 이충걸 전 GQ 편집장이 문화 현상의 이면을 새롭게 들춰 봅니다. 현재 서울 필동에 사는 이 전 편집장의 ‘멘션(mentionㆍ촌평)’은 격주 수요일자 <한국일보> 에 실립니다


최근 방영한 mbc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시점'에 출연한 배우 김강훈(11)군과 방송인 유병재(32)씨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방송 캡처

최근 방영한 mbc예능 프로그램 '전지적 참견시점'에 출연한 배우 김강훈(11)군과 방송인 유병재(32)씨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을 선보여 화제가 됐다. 방송 캡처


언젠가 잡지 ‘페이퍼’에 이렇게 적었다. “좋은 친구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좀 생각이 달라졌다. 좋은 친구 역시 사라진다. 사랑이 가면 옛날이라도 남지만, 우정이 끝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예전에는 친구와 멀어질 때 호된 과정을 겪었다. 술잔을 앞에 두고 왜 그랬느냐고 따지고 오해라고 외치며 서로 멱살 잡는 퍼포먼스를 벌인 다음엔, 소주 한 잔 톡 털어 넣으며 화해하거나 분통한 눈물을 뿌리며 등을 돌렸다. 친구는 얻기도 어려웠지만 잃기는 더 어려웠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다.

위기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식당, 어떤 도시, 어떤 직장을 버리는 방식으로 친구를 쉽게 버린다. 해체되는 우정의 시그널도 없이 단 한 번의 실망으로 피를 맹세하던 우정을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마무리 짓는다. 어떤 기미도 없이 관계로부터 탈출한다. 휴대폰에서 그의 사진을 치운 적 없고, 친구 이름은 매일의 대화 주제가 되며, 서로 굉장한 친구라는 난공불락의 평판이 내내 따라 다닌다고 해도 한 번 균열이 생기면 서로 반대 극점을 향해 멀어져 다시는 붙지 않는다. 벌어진 앞니처럼.

우정에 관해선 다들 할 말이 많다. 예를 들어 친구와 나이 차이가 큰 경우, 같은 시절을 보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냐고 캐묻는다. 그렇게 따지면 쇼스타코비치는 왜 찾아 듣고 르네 마그리트 전시에 왜 가나? 시대도 한참 다른 그 옛날 사람이 만든 걸?

나의 베스트 프렌드는 나보다 스물한 살 많은 연극배우 박정자이다. 나보다 스물 여덟 살 어린 친구의 자식도 나의 기막힌 친구이다. 만약 나이가 친구의 조건이라면, 내가 평소에 “한 살 차이는 친구로 쳐주지만 그 아래로는 다 꿇어!”이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친구는 영원히 갖지 못했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기에겐 이미 소중한 친구가 많고, 그들을 더 챙기기도 바빠서 새 친구를 사귀지 않겠다고 말했다. 뭐, 그들이 언제까지나 곁에 남아준다면야. 우정은 확실히 아주 중요한 남성용 주제이다. 내 말은, ‘의리’가 강조되는 순간 어떤 우정도 모래보다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삼 년 전에 늘 붙어 다니며 깔깔 대던 친구들이 지금은 몇이나 남았나?

우리는 긴밀한 사회적 연결과 행복의 연관성을 알고 있다. 무슨 영향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순서가 뒤섞여 행복이 먼저 온 뒤에 친밀한 관계가 오기도 할 것이다. 무엇에 속했다는 주관적 감각의 특별함이랄까. 언젠가 집을 정리하다 말고 차분히 주저앉아 캐비닛에 보관해둔 편지와 엽서를 다시 읽었다.

여전히 좋은 사람, 저절로 멀어진 사람, 누군지 생각 안 나는 사람, 모두 편지 안에선 다정하기만 했다. 나에게 이런 마음을 주었다는 걸 그들은 기억할까? 내가 준 편지는 또 간직하고 있을까? 어떤 편지는 간직하고 어떤 편지는 버렸다. 그런데 그 즈음 우정이 무엇일까에 대해 부정적으로 돌아본 일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후배가 중고 서점에서 내가 쓴 책을 샀다고 전화를 했다. 표지를 들추자 내가 책을 받는 이에게 쓴 짧은 편지가 보였는데, 무척 친한 사람 같았다고 했다. 후배는 우정을 종이 값에 매도한 사람의 이름을 일러주었다. 이따금 만나 희로애락을 나누며 호형호제하던 친구였다. 어떤 의미론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왜냐하면 발등을 찍는 건 항상 믿는 도끼니까. 나쁜 건 그를 친구로 여겼던 나의 미욱한 분별심뿐.

사람들은 우긴다. 사랑은 노력해야 하지만 우정은 공 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주어진다고. 우정의 형식이 결정된 뒤에는 정해진 스텝만 걸으면 된다고. 그러나 의미 있는 관계라면 (심지어 불만족스러울 때도) 그 안에 포함되는 동시에 구속될 것이다.

밀접한 관계란 단지 알고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서로 안다는 얘기 아닌가. 어떤 관계든 시간을 들여야 유지된다. 꼬였을 땐 풀 시간이, 찢어졌을 땐 꿰맬 시간이. 친구가 부르면 제때 뛰어갈 반응 속도도 장착해야 한다. 그런데 가끔 갸웃해진다. 우정에 시간이 그렇게 중요한 가치라면 왜 옛날 친구는 지겹고 학교 동창은 따분할까?

몇 분 전, 아니 몇 달 전, 몇 년 전을 뒤돌아 보면 중대한 실수들이 바구니에서 쏟아지기 직전인 구슬처럼 기다린다. 생각지도 않게 일이 커졌다거나, 은행에서 금치산 판정을 받았다거나, 정부가 퉁가에 있는 내 명의의 방갈로를 압류했다거나. 그러나 어떤 것도 친구가 세 번이나 약속을 취소한 것보다 심각하지 않다.

야생 다람쥐는 사람들이 숲길을 걸을 때 겪는 시행착오(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같은)를 겪지 않으며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주는 안전 의식만 있다. 생태학은 ‘선택적으로 제한된 필요’를 일러주고 생체 기관에 동료와 침입자, 음식과 위험 인자를 인식시켜 그에 따라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친구를 사귈 때는 배우자를 찾을 때 노골화되는 ‘교환’의 문제가 아닌 각자 정한 기준(친절함과 취향, 이야기를 듣는 방식과 위트 같은)을 따른다. 우리는 시장 좌판에 놓인 물건이 아니라서 친구를 ‘쇼핑’하지 않고 ‘결정’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우정을 위해 날마다 목숨을 걸진 않는다.

이십 대의 바다엔 흔한 감정이 펼쳐져 있었다. 바람을 타기 위해 계속 노를 저어야 했지만 나에겐 그 나이가 가르쳐준 사회적 자의식이 없었다. 서클이나 동아리에 든 적도 없고, 동창회며 동문회에 간 적도 없다.

본격적인 선들로 뒤엉키는 관계를 가동할 줄 몰랐던 대신 그 빈 공간을 친구들로 채웠다. 그들에게 나를 인증하고 기록하고 감정하는 것만으로도 스물네 시간이 모자랐다. 나에겐 가혹해도 친구의 실수에는 속이 뒤틀리도록 관대했다. “우리 십년 뒤에 그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 같은 동화가 그대로 진실이던 시절, 우리가 친구라는 사실을 온 나라가 알고 미래가 알게 하고 싶었다.

의심 많은 기억의 손가락으로 더듬어보면, 그때 그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슈퍼 세균이 되어 모두를 망가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 그 친구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만 남고 다 사라졌다. 사이드 미러로 스쳐 지나간 풍경처럼 나에게 달려왔다가 증발해버렸다.

우리에겐 두 가지 미신이 있다.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며 내 진정 쉴 곳은 집 뿐이라는 미신. 그리고 우정은 사랑보다 순수하며 정금처럼 변치 않는다는 미신. 과거의 지혜는 친구(親舊)란 친할 친, 옛 구, 오랜 우정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새로운 지혜는 우정을 지키리라는 다짐이 아무리 단호해도 앞으로 닥칠 균열을 피할 순 없다고 소근거린다. 그 결과로 “우리 우정 언제까지나 변치 말자”는 결의는 “영원히 너만을 사랑해”라는 레토릭만큼 시큰둥해졌다.


sbs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출연한 개그우먼 박나래와 장도연이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방송 캡처

sbs예능 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출연한 개그우먼 박나래와 장도연이 서로를 향한 진심 어린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방송 캡처


그 동안 우정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 친구들에게 의존하는 동안 감각은 나의 것이되 스스로는 내 삶의 타자일 때도 있었다. 이제 나는 친구란 관념적으로 형제라는 통념을 거부한다. 우정이라는 관계의 미래도 믿지 않는다. 우정의 영속성 역시 믿을 게 못 된다는 것도. 그러니까 우정도 사랑처럼 많은 것을 약속하면 안 된다. 그럼 너무 외로우니까. 롱런을 약속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나약하니까.

나는 늙어갈 일이 길로틴처럼 머리 위를 지키고 온천에서 틀니를 잃어버리는 나이가 된다고 해도 친구들에게 기대지 않겠다고 내 자신에게 주의를 주었다. 어떤 노트에는 이렇게 적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너의 동맹군은 바로 네 자신이야. 그러니 매 순간 스스로를 믿어. 믿을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겠지만."

아무리 마음을 기울여도 오래 사귄 친구의 고독에 손도 댈 수 없다는 것을 안 어느 가을, 내가 누군가에게 종이 한 장의 위로도 될 수 없다는 것이 슬펐다. 그건 평생을 같이 산 엄마가 우울증 진단을 받았을 때 같은 소외감과 무척 비슷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우리 집에서 임종을 맞을 것 같아.” 확실히 농담은 아니었다. 다른 날 다른 친구도 말했다. “우리 죽으면 서로 영정 사진 들어주자.” 그 말은 기분이 아니라 진담이었다. 그날 밤, TV에는 어렸을 때부터 60년을 같이 놀던 동네 친구 세 할아버지가 나왔다. 리포터가 그 긴 세월 우정을 지킨 비결이 뭐냐고 묻자 한 분이 말씀하셨다. “참는 것.” 그럴까? 나에게 관 속에 들어간 뒤의 일을 약속한 친구들은 나를 얼만큼 참아줄 자신이 있을까? 변질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우정의 순진함이 이렇게 서로를 아이 같은 애착 관계로 돌려놓은 걸까?

이제 나는 안다. 아무리 부인해도 친구는 가난한 나에게 은행과 같으며, 나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그렇게 고아가 된 기분으로 영원을 약속하는 것이야 말로 우정의 마지막 신비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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