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인인지 임차인인지 본인도 헷갈리고 시민들도 어지럽다. ‘임대차인’이라는 신조어라도 만들어야 할 판이다. 내 집값 오를 때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종합부동산세가 오르니 펄쩍 뛴다. 그렇게 펄쩍 뛸 수 있는 사람들 고작해야 1%에 불과하다. 언론에서도 부동산 문제가 나올 때마다 악평이다. 그러면서 열심히 분양광고 싣는다. 돈이 되니까. 돈 앞에 장사 없지만, 도덕도 윤리도 없다. 이러다가 공룡만 남을 판이다. 공룡만 남으면 생태계가 파괴될 것이고 제 살 깎아먹다 결국에는 공룡도 굶어 죽게 될지 모른다. 그런데도 당장 눈앞의 이익에만 골몰한다.
부동산에만 공룡들이 서식하는 건 아니다. 찌그러진 밥그릇 신세인 출판계에 몇몇 공룡이 어슬렁거리며 어렵사리 만들어 놓은 도서 정가제라는 생태계를 파괴하려 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뒷짐이다. 만만한 동네라고 업신여길 뿐이다. 출판문화산업을 담당하는 공기업도 먼 산만 바라본다. 심지어 출판업계를 대표한다는 여러 협회조차 떡고물만 생각하는지(대형 출판사들로서는 5년쯤 넘은 재고를 대폭 할인해 재고 부담도 줄이고 현금화할 수 있으니) 속으로는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아니, 어쩌면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인지 모른다.
핑계도 허접하다. 소비자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란다. 책 사는 비용이 부담스러운 시민들도 많다. 그 입장에서는 할인하는 게 왜 잘못이냐고, 책은 왜 가격 경쟁하면 안 되는지 불평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솔직히 지금도 책은 싼 편이다. 커피 서너 잔 값이면 여러 해 연구하고 숙성시켜 많은 고생 끝에 펴낸 책 구해서 며칠 만에 내 지식으로 만들 수 있다. 종이더미로 계산할 게 아니라 책의 질적 내용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책 한 권 펴낸들 초판 1쇄의 턱을 넘지도 못하는 책들이 부지기수다. 책 써봐야 힘만 들고 돈도 되지 않으니 좋은 연구와 출판을 포기하는 학자와 작가가 이미 많다.
책은 단순한 공산품 같은 소비재가 아니다. 일종의 문화적 공공재다. 그 가치를 소중하게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정당한 값을 지불해야 그 자산이 풍부해진다. 80% 할인으로 사면 당장은 몇 천 원 이익 보는 것 같을지 모르지만 마케팅과 덤핑을 감당할 경제력이 있는 몇몇 대형 출판사들과 네이버나 카카오 등 포털 기업들의 수중에 휘둘리게 될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쫓아낸다’는 그래셤의 법칙은 더 이상 경제 이론으로는 효력이 없지만 문화계에서는 오히려 더 기승을 부린다. 가짜가 진짜를 쫓아내고 껍데기가 알맹이를 멸시하게 된다. 이익이 될 책들만 마케팅하고 포털사이트에 노출한다. 1+1이나 연중 바겐세일이 성행할 것이다. 할인 편법은 상상 이상으로 다양하다. 값을 올려붙이고 50% 할인하는 건 애교 수준이다.
대형 출판사와 대형 서점도 필요하고 역할과 장점도 크다. 그러나 도서 정가제가 무너지면 그들의 독점은 필연적이다. 다양성은 사라진다. 겨우 고개 내민 동네 책방들은 금세 아사할 것이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출판관계 협회들이 진짜 해야 하는 건 여전히 지지부진한 출판사와 서점 간의 공급률 책정의 문제를 개선하는 방법이다. 개선하고 강화해도 모자랄 판에 거꾸로 가는 문화정책이다. 출판계가 힘 없고 만만하니 자기들 편하고 입맛 맞는 대로 해도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출판단체들이 정부도 독자도 설득하지 못하고 세월만 축낸 건 아닌지 먼저 반성할 일이다.
좋은 책이 제 값으로 많이 팔려서 출판사는 더 좋은 책을 만들고 저자는 더 깊이 있는 저작을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투자의 하나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좋은 책이 나올 수 있는 환경 가운데 하나가 강력한 도서 정가제 덕분이다. 도서 정가제는 폐지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고 합리적인 개선을 찾아내야 할 덕목이다. 출판 생태계가 무너지면 문화 생태계에 변이가 온다. 21세기는 콘텐츠의 시대다. 이른바 한류 열풍의 바탕도 콘텐츠다. 출판 생태계가 무너지는 건 결국 콘텐츠 기반을 악화시킬 뿐이다. 소비 논리가 전부는 아니다. 공룡의 시대를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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