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IP 유니버스의 블랙홀 '팬덤'
편집자주
디지털시대를 맞아 콘텐츠 산업의 화두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 떠올랐습니다. 다양한 플랫폼이 있는 만큼 이제 매체보다 콘텐츠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관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한국의 도전도 이제 시작됐습니다.
단순한 ‘독자’나 ‘관객’이 아니다. 이 시대 콘텐츠 이용자들은 세계관 형성의 적극적 가담자에 더 가깝다. 좋아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영화로, 애니메이션으로, 게임으로도 즐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이들에게 당연하다. 영상화가 결정되기도 전에 어울릴 만한 배우를 찾아 가상 캐스팅을 해보고, 유튜브에 리뷰 영상을 올리며 직접 2차 콘텐츠를 창작해낸다. 플랫폼을 넘나들며 이야기를 다각적으로 소비하는 이들은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시대를 이끄는 또 다른 주인공이다.
재밌는 소설? 만화로도, 영화로도 보고 싶어
지난달 5월 네이버웹툰에서 연재를 시작한 ‘전지적 독자시점’은 싱숑 작가의 동명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미 누적 조회수 1억뷰를 달성한 바 있는 이 인기 웹소설은 최근 웹툰이 공개된 뒤 다시 주가가 상승하며 웹툰 공개 한 달 만에 웹소설 매출액 16억원을 돌파했다. 연재 중인 만화의 다음 내용이 궁금한 독자들이 이미 완결된 웹소설을 찾아 읽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웹소설’과 ‘웹툰’의 독자는 구분돼 있었다. 웹툰이 네이버나 다음처럼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포털 사이트에서 서비스되며 대중적 기반을 쌓은 것과 달리, 웹소설은 특정 연령, 혹은 특정 취향의 사람들만이 즐기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3년 네이버가 ‘네이버웹소설’을, 카카오가 ‘카카오페이지’를 출시하면서 이 같은 심리적 장벽은 무너졌다. 웹소설 독자의 반응을 가늠자로 삼아 웹툰 제작이 결정되고, 이어 드라마나 영화 등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늘어났다.
2018년 tvN에서 방영돼 최고시청률 10.6%를 기록하며 선전한 드라마 ‘김비서가 왜 그럴까’의 경우 카카오페이지 로맨스 분야 1위를 기록한 정경윤 작가의 동명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이 웹소설은 이어 김명미 작가의 동명 웹툰으로도 만들어졌다. 이 같은 콘텐츠의 다각적 활용은 자연히 드라마 시청자가 웹툰을, 웹툰 독자가 웹소설을 찾아 읽도록 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올해 초 드라마로 제작된 다음 웹툰 ‘이태원 클라쓰’는 방영 직후 드라마 인기에 힘입어 600만명이었던 웹툰 구독자 수가 1,500만명으로까지 늘었다.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 통계에 따르면 웹소설 시장 규모는 5,000억원이다. 시장 규모 1조를 넘긴 웹툰에 비하면 아직 절반 수준이다. 플랫폼 회사 입장에서는 영상, 웹툰에 비해 아직 소규모 시장인 웹소설 콘텐츠의 IP(지적재산)를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허브로 활용할 수 있는 셈이다. 나아가 스튜디오N(네이버), 카카오M(카카오) 등 자회사를 설립해 본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의 도약을 꿈꾸는 상황에서 더할 나위 없는 ‘삼위일체’다.
‘독자’ 아닌 ‘팬덤’의 마음을 움직여라
지난해 방영된 네이버웹소설ㆍ웹툰 플랫폼인 ‘시리즈’의 TV광고는 배우 수애를 내세웠다. 2018년 11월부터 연재돼 누적 매출만 40억을 돌파하며 웹소설 신화를 쓴 ‘재혼황후’ 속 황후 캐릭터를 수애가 직접 연기한 것이다. 서늘한 표정으로 소설 속 황후의 대사를 읊조리는 수애의 모습은 ‘싱크로율 100%’라는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내며, 다시금 ‘재혼황후 가상 캐스팅’ 열풍을 불러 일으켰다.
시리즈의 광고는 최근 몇 년 전부터 온라인에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가상 캐스팅’ 유행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소설이나 만화가 인기를 끌면, 해당 작품 속 등장인물을 연기할 배우들을 독자들이 직접 캐스팅해보고 나아가 가상 예고편까지 만든다. 여기에는 반응이 좋은 원작은 언젠가 영상화될 수 있으리라는 ‘학습된 기대’가 작용한다. 웹소설, 웹툰 등 원작이 있는 영화나 드라마의 비중이 늘어나면서 자연히 이를 하나의 수순으로 여기는 것이다.
‘가상 캐스팅’을 해보고, 관련 ‘짤방’을 만들고, 댓글로 작가에게 훈수도 마다 않는다. 유튜브에 리뷰 영상을 올리고, 방영 중인 드라마 감상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실시간으로 나눈다. 독자면서 관객이고, 동시에 시청자인 이들은 생산자가 소비자에게 일방적으로 콘텐츠를 제공했던 기존 미디어와 구분되는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다. ‘팬덤’으로도 표현되는 이들 이용자는 콘텐츠에 대한 충성도 높은 애정을 기반으로 콘텐츠의 다양한 변주를 직접 이끈다.
학계에선 이를 '향유자'라 부른다. 단순한 콘텐츠 소비를 뛰어넘어 '즐거운 가치 창출 체험' 그 자체를 즐긴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콘텐츠는 하나의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라, 느슨한 형태의 기본 골격을 바탕으로 무한하게 변주되는 콘텐츠가 된다.
K-콘텐츠의 미래, ‘K-팝’의 세계적 성공에서 배워라
“방탄소년단 ON 뮤비 해석-정국 혼자만 손목이 묶인 채 달리는 이유는?”
구글에 ‘방탄소년단 세계관’을 검색하면 이처럼 팬들이 제작한 관련 영상이 약 7만600개 검색된다.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2015년 발매한 앨범 ‘화양연화 pt1’에서부터 가장 최근 앨범에 이르기까지 줄곧 관련 콘텐츠에 ‘BU(BTS Universeㆍ방탄소년단 세계관)’라는 로고를 표시하고 있다.
이 세계관 아래서 멤버들은 각각 현실에 상처받은 일곱 소년의 캐릭터를 지니며, 뮤직비디오와 소설, 웹툰과 숏필름 등에서 이 캐릭터를 중심으로 한 커다란 이야기가 연출된다. 새 앨범이 발표될 때마다 소속사는 곳곳에 이 세계관의 힌트를 심어놓고, 팬들은 이것들을 찾아내 서사의 빈 부분을 추론하고 토론하며 ‘BU’라는 세계관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중소기업 아이돌이었던 방탄소년단이 자신들의 브랜드를 공고히 하고 세계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 같은 치밀한 세계관 형성이 바탕이 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방탄소년단뿐만 아니다. K웹툰, K드라마의 흥행에 앞서 전세계를 강타했던 K팝의 성공은 단순한 음악을 공급하는 행위를 벗어나 팬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요소를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전문가들은 해석한다.
조민선 이화여대 융합콘텐츠학과 연구자는 논문 ‘한국 아이돌 콘텐츠의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 연구’(2019)에서 “아이돌 콘텐츠는 팬덤의 참여로 인해 개별 팬들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다성적 서사체로 거듭나게 되며, 서사 생성에 있어 제한이 없기 때문에 스토리월드가 끊임없이 확장될 수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 아이돌과 K팝의 성공에서 알 수 있듯 팬덤과 세계관을 중심으로 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은 웹툰과 웹소설 등 단순한 이야기 콘텐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특히 유튜브와 넷플릭스처럼 전세계인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플랫폼이 자리잡았고 자동번역 기능 등을 통해 언어의 장벽마저 사라진 상황에서, K콘텐츠가 해외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앞서 K팝이 개척한 길을 적극 참고할 필요가 있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15년 전만 해도 미국 시장에 우리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려면 2년 전부터 디즈니에 미팅을 예약해야 했고 그러고도 문전박대 당했지만, 지금은 콘텐츠만 훌륭하다면 이용자들이 얼마든지 직접 찾아볼 수 있는 시대”라며 “유통이 손쉬워진 만큼 더욱 이용자가 찾아가고, 개입하고, 탐험적 향유를 할 수 있는 ‘스토리 월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설명했다.
"향유자가 언제든 찾아와 뛰놀 수 있는" 이야기의 힘
넷플릭스에서 연상호 감독 연출의 오리지널 드라마로 제작중인 ‘지옥’은 어느 날 미지의 존재가 나타나 지옥행을 고지하면서 벌어지는 세상의 혼란을 그린다. 2003년 연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이 출발이 됐고, 지난해 연 감독과 최규석 작가가 합작해 웹툰으로 만들었다. 올해 하반기면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만나볼 수 있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에 최적화한 이 이야기에는 고정된 결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는 끝나지 않고, 그 세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연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지옥’은 언제 어디서 끝이 나도 상관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읽는 사람들이 완결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언제든 끝날 수 있는 거죠. 이 작품은 한 세계에 관한 이야기고, 한 세계 안에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의 얘기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독자도, 창작자 개인으로서도 놀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와 놀 수 있는 세계, 그게 바로 ‘지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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