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주년 광복절 경축사 "한 명의 국민도 포기 안 해"
한일관계, 극일 아닌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 강화
문재인 대통령은 15일 제75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개인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존재하는 나라를 생각한다”며 ‘헌법 10조 시대’를 선언했다. 올해 들어 “모든 국민의 삶을 보장하는 실질적 민주주의”(4ㆍ19혁명 기념식)와 “함께 잘살 수 있는 세상”(5ㆍ18민주화운동 기념식), “지속 가능하고 보다 평등한 경제를 통한 실질적 민주주의 성취”(6ㆍ10민주항쟁 기념식)라는 비전을 제시한 데 이어 ‘일상적 민주주의’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국정 기조로 삼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 대통령 “대한민국은 단 한 사람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을 것”
문 대통령은 “과연 한 사람 한 사람에게도 광복이 이뤄졌는지 되돌아 본다”며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는 헌법 10조의 시대, 우리 정부가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라고 밝혔다.
특히 “대한민국의 이제 단 한 사람의 국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천명하면서 “(국력이) 그만큼 성장했고, 그만큼 자신감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극복 과정에서 특별수송기와 군용기ㆍ대통령전용기까지 투입해 교민 2,000여명을 국내로 안전하게 이송한 사실 등을 소개했다.
문 대통령이 ‘헌법 10조 시대’를 선언한 데는 지난해 이른바 ‘조국 사태’와 올해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인국공) 사태’ 등에서 확인된 민심이 반영됐다. 국민들이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얼마나 민감하게 여기는지 확인됐기 때문이다.
최근 문 대통령 지지율 하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는 부동산 문제도 그 뿌리에는 공정과 정의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게 청와대와 여권의 판단이다. 문 대통령이 “정부는 그 동안 자유와 평등의 실질적 기초를 탄탄히 다지고 사회안전망과 안전한 일상을 통해 저마다 개성과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한 사람의 성취를 함께 존중하는 나라는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코로나 사태 이후 2030세대의 주식 매수가 급증하는 ‘동학개미 운동’ 현상도 결국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할 ‘공정의 사다리’가 더는 남지 않았다는 불안감이 반영된 것이란 평가도 있다”며 “경제적 격차 해소를 통한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 핵심 과제”라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 "일본과 언제든 대화"... '극일'은 언급 안해
문 대통령은 한일ㆍ남북 관계에서도 ‘개인의 존엄과 행복을 위해 국가’라는 원칙을 적용해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극일(克日)을 내세웠던 데서는 한발 물러섰지만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기존의 원칙은 한층 강화한 메시지다.
문 대통령은 특히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어르신은 지난해 일본의 수출규제가 시작되자 ‘나 때문에 대한민국이 손해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하셨다”며 “우리는 한 개인의 존엄을 지키는 일이 결코 나라에 손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또 “대법원 판결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방침도 재확인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배상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는 기존 대원칙을 재차 못박았다.
이 때문에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 내각이 원하는 외교상황 조성은 당장은 어렵게 됐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아베 정권이 지금까지의 대(對) 한국 기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한일 정부가 평행선을 달릴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의 대일 발언은 강제동원 문제와 관련한 ‘정치적 해법 도출’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겠다는 원칙적 수위다. 일본과 대화의 문을 열어 둠으로써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이달 4일 일본제철 자산 압류 명령 효력이 발생한 뒤 한층 높아진 양국 긴장을 일단 '관리'하는 데 방점을 찍은 것이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일본과의 협상 접점을 현재로선 찾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남북 협력 의지 재확인... 올해는 '북한'이란 단어 한 차례 안써
대북 메시지도 어느 때보다 단출했다. 2017년 취임 첫해 경축사에선 남북관계 관련 발언에 2,600자 이상을 할애했지만, 올해 경축사에선 1,000자 안팎에 불과했다. ‘남북’이라는 단어가 8차례 쓰였지만, ‘북한’이란 단어는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2017년 14회, 지난해 9회 ‘북한’을 언급했던 것과 비교된다.
남북 관계 진전을 위한 새로운 구상이나 장밋빛 청사진은 없었다. 대신 “진정한 광복은 평화롭고 안전한 통일 한반도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꿈과 삶이 보장되는 것”이라며 “우리가 평화를 추구하고 남과 북의 협력을 추진하는 것도 남과 북의 국민이 안전하게 함께 잘 살기 위해서”라며 취임 3주년 기념연설에서 밝힌 ‘인간안보’의 기조를 이어갔다.
남북 협력사업 제안도 남북 철도ㆍ도로 연결사업 등 ‘이미 합의한 사안’ 남북 협력사업 제안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문 대통령은 “죽기 전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보고 싶은 곳을 가볼 수 있게 협력하는 것이 실질적인 남북 협력”이라며 이산가족 상봉이나 북한 개별관광도 간접적으로만 언급했다.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임기 내 비핵화 △2032년 남북 공동올림픽 △2045년 평화와 통일로 하나된 나라(One Korea) 등 구체적 청사진을 공개했던 것과 대비된다.
올해 6월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소 폭파 등을 감안해 대북 메시지를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매우 차분한 경축사”라며 “11월 미국 대선 이후까지 감안해야 하는 상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 대선 전에 남북관계 진전 동력을 확보하는 게 문재인 정부의 목표”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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