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베이루트를 초토화시킨 대규모 폭발 사고 이후 레바논 국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다. 안 그래도 허약하기만 했던 민생 경제의 모순이 참사를 계기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국고는 텅 비어 돈도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없고, 먹을거리 가격은 치솟아 통조림 하나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인 레바논의 미래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6일(현지시간) “새로운 위험이 레바논을 괴롭히고 있다”며 빈곤과 기아가 일상이 된 현실을 전했다. 40%에 달하는 실업률과 엄청난 인플레이션, 10개월 동안 무려 80% 넘게 하락한 레바논 파운드화 가치 등 레바논 경제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가 폭발 참사를 통해 까발려졌다는 게 신문의 진단이다.
요즘 레바논 국민들은 배고픔에 지쳐 있다. 지난해 향수와 장난감 가게를 폐업한 무하마드 문지르(48)는 5명의 자식을 건사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콩 통조림 하나로 온 가족이 입에 풀칠을 해야 할 만큼 참사 이전에도 상황은 나빴다. 근근이 가짜 향수를 팔아 연명했지만 폭발 사고 여파로 지난 3주간은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치솟는 물가에 “아무것도 살 수 없다”는 절망이다. WSJ는 “인플레이션을 따라잡지 못해 상품 가격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오르고 있다”며 “일부 브랜드는 아예 이른바 ‘짝퉁’으로 대체돼 진열대에서 사라졌다”고 전했다.
국제금융기관들은 이전부터 레바논의 빈곤 문제를 꾸준히 경고해왔다. 세계은행(WB)은 지난해 11월 상황을 이대로 방치하면 레바논 국민의 22%는 극빈층, 45%는 빈곤층 아래로 내몰릴 수 있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베이루트 참사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수입 곡물의 80%를 들여오는 베이루트항 폭발로 식량난은 더욱 가중될 것이 확실하다. 유엔은 당장 식량 배급 등을 위해 4,700만달러(약 570억원) 이상이 필요하다고 추산하지만 긴급 지원자금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는 견해가 보다 우세하다. 세계식량계획(WFP)도 6주 뒤면 레바논의 밀가루 재고가 고갈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고 수습은 미봉책일 뿐, 레바논 경제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 고치지 않는 한 빈곤 탈출은 요원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는 “레바논 정부 부채 3분의2를 현지 은행들이 떠안고 있고, 중앙은행은 재정 적자를 충당하기 위해 시중은행들로부터 돈을 빌려 막고 있는 처지”라고 보도했다. 또 올해 1월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레바논 중앙은행의 총 외환보유액을 370억달러, 지역은행들의 부채를 525억달러로 평가했다. 외환보유고를 전부 소진하고도 남을 만큼 빚이 쌓여 있다는 얘기다. 5월부터 진행 중인 국제통화기금(IMF)과의 구제금융 협상은 도통 진척이 없는 상황이다.
망가진 금융시스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은행들은 달러 인출을 50달러 이하로 제한하는 등 현금 인출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고, 카드 사용도 원활치 않다. 현금도 없는데 판매자들은 현금 지불을 요구하니 국민들이 물건을 살래야 살 수 없는 구조다. 이코노미스트는 다만 “수십년간 지속된 부패를 구조조정하는 것보다 차라리 부채 구조조정이 쉬울 것”이라며 정부와 정치권의 자정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제 전문가들은 단시일에 생산ㆍ소비 체계를 바꾸기는 어려운 만큼 우수한 노동력과 관광 등 외부 요인에서 성장 동력을 발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레바논은 중동에서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고 다국어를 구사하는 노동력도 많아 기술산업 개발에 유리하다. 여기에 농업 친화적인 온화한 날씨, 국내총생산(GDP)의 19%를 차지하는 관광업 등도 발전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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