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세종과학기지 인근 해안엔 ‘펭귄 마을’과 ‘물범 마을’이 있다. 공식 명칭은 아니지만 연구자들이 즐겨 부르는 지명인데, 이름 그대로 펭귄과 물범이 모여 있는 곳이다. 펭귄 마을은 젠투펭귄과 턱끈펭귄 5,000여쌍이 모여서 번식하는 곳이라 둥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고 새끼를 키우느라 부모들은 늘 북적북적 바쁘게 오고 간다. 마을 초입에서부터 마치 복잡한 시장에 온 것처럼 시끄러운 펭귄 울음소리가 들린다. 반면에 물범 마을은 웨델물범과 남방코끼리물범 10~20여마리 정도가 찾아와 코를 골며 잠을 자는 곳이다. 바다와 눈의 경계에 배를 깔고 누운 물범들은 마치 해수욕을 하는 사람들처럼 여유 있어 보인다. 그 풍경은 한국의 여름 바닷가와 비슷하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또 있었는지, 이곳 해안을 누군가 ‘해운대 해안(Haeundae Beach)’이라 이름을 지었고 실제로 남극 지명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펭귄 마을 펭귄의 경우 지난 몇 년 간 조사를 통해 그들의 번식과 행동 생태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지만, 정작 물범 마을에 사는 동물들의 생태를 잘 알지 못했다. 가끔 마을을 다녀가는 손님들이라 많은 숫자를 보기도 어렵고, 이들의 번식기가 남극의 여름을 빗겨나 있어서 연구자들이 관찰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 연유에서 생물학자 가운데 물범과 물개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물개는 귓바퀴가 있고 지느러미 같은 앞다리로 몸을 세우는 반면, 물범은 귓바퀴가 없고 앞다리가 짧아 늘 바닥에 몸을 대고 있다). 게다가 물범이란 학명 대신 한자식 표기인 ‘해표’라는 이름으로 부른 사람도 많았다. 문헌을 조사해보니 세종기지 인근 지역은 몇 마리가 번식을 하고, 언제쯤 새끼를 낳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도 잘 나와 있지 않았다.
남극 기지에서 일 년을 보내는 월동대원들에게 물범 관찰 기록을 수소문했다. 동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놓았을 거라 생각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자료를 모아보니 이 지역의 번식 생태가 눈에 들어왔다. 해마다 차이는 있지만 세종기지가 있는 바톤반도 해안에서 2~3마리가 관찰됐다. 남극의 봄이 오기 시작하는 9월이 되면 출산을 앞둔 어미는 얼음 위에 올라와 홀로 새끼를 낳았다. 젖을 먹이는 동안 어미는 새끼를 돌보기 위해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 얼음 위에만 머무르며 단식을 했다. 그렇게 약 2주가 지나면 어미와 새끼는 함께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시작했다.
총 4년간의 번식 기록 중 유독 2016년엔 물범의 번식이 기록되지 않았는데, 그 해에는 겨울이 유독 따뜻해서 얼음이 거의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웨델물범은 얼음 위에 자리를 잡고 새끼를 낳는데, 만약 바톤반도 인근 바다가 얼지 않으면 출산할 장소를 찾는데 애를 먹는다. 세종 기지 인근 지역은 최근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점차 바다 얼음이 줄어들고 빙하가 녹는 속도가 빨라지고 있기 때문에 웨델물범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지금의 온난화 추세가 계속된다면 머지 않아 이곳에서 웨델물범의 번식을 관찰하기 어려워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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