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칼럼에 내걸 간판을 두고 지인들에게 설문을 진행했습니다. 음악적 글쓰기의 정체성이 직관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우선 후보군을 음악용어로 간추렸습니다. 페르마타, 레가토, 낮은음자리표. 이렇게 3가지를 제안하자니 여러 의견들이 답지하더군요. 지인들은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칼럼의 문패는 모름지기 음악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친근한 대중성을 견지할 것. 간판의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음악용어 3가지는 이 지면의 방향성과 고스란히 잇닿아 있습니다.
우선 ‘페르마타(Fermata)’가 유력 후보였습니다. 머문다는 의미를 가진 이 음악용어는 경직된 긴장을 풀어헤쳐 느슨한 이완을 이끌어 냅니다. 오선지엔 눈동자처럼 생긴 기호를 그려 넣어 표시하는데 눈꺼풀을 얹은 음표는 원래의 음길이보다 2,3배 더 생명이 연장됩니다. 그러므로 페르마타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선 음표의 잔향까지 들을 수 있는 여백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나홀로 독주가 아닌 여럿이 협업하는 앙상블이라면 페르마타의 연장된 시간을 다루는 상호 간 소통도 필수적입니다. 잠시 멈추었다 다시 출발하는 순간,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며 타이밍을 조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눈동자를 닮은 페르마타 기호는 그 생김새부터 시선을 맞추는 소통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칼럼에 ‘페르마타’란 간판을 내걸었더라면 일상의 여백과 소통을 음악으로 일깨우려 했을 겁니다. 숨 가쁘게 질주하는 속도전에 휘말리지 않은 채, 잠시 늦추고 머물러, 생각의 잔향을 만끽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는 또 이런 의견을 제안했습니다. “피아니스트의 칼럼이라면 당연히 ‘레가토(Legato)’로 승부해야지.” 맞습니다. 음과 음을 연결하는 레가토 기법을 완성하기 위해 피아니스트는 가장 많은 공을 들이기 마련입니다. 반면 이 테크닉은 악기가 가진 근원적 한계의 역설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태어난 동시 사라져버리는 피아노 소리는 아무리 건반을 지속해 누른다 해도 그 울림이 곧 공기 중으로 증발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만들어 낸 소리는 다시 돌이킬 수 없고 여느 악기처럼 강약에 변화를 줄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 악기는 양털로 둘러싸인 망치가 현을 때리며 소리를 만드니 타악기적 속성마저 강화됩니다. 그러므로 음과 음 사이를 끊어지지 않도록 연결하는 레가토 기법은 청각적 환상에서 기인하는 동시, 피아노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연주기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피아니스트라면 누구나 이 착청(錯聽)에 맞서 분투합니다. ‘레가토’를 칼럼의 간판으로 삼았다면 불가능한 현실을 향한 부단한 도전, 독자와 필자를 잇는 연결을 의도했겠지요.
설문을 진행한 대다수가 선택한 마지막 후보는 ‘낮은음자리표’였습니다. 앞의 두 용어보다 직관적 이해가 가능하다보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더군요. 애초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클래식 음악처럼 여러 성부의 층위가 입체적으로 겹쳐진 곡을 들을 때, 우리의 귀는 고음역에 자리 잡은 주선율에 금세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켜켜이 쌓아올린 화음의 정체성은 가장 낮은 곳에 뿌리내린 근음(根音)에서 비롯됩니다. 높은 음역에서 쩌렁쩌렁 으스대는 주선율만 쫓아갈 것이 아니라, 마치 빙산의 밑동처럼 풍성한 화성으로 펼쳐지는 낮은 음역에 귀 기울이는 것. 이 칼럼의 소중한 이정표로 삼고 싶었습니다.
이제껏 음악가로서 헤매왔던 방랑이 그러했듯 '음악은 사고와 감정을 어떻게 전달하는가' '음악은 사회와 어떤 영향을 주고받는가'라는 통찰을 뼈대삼아 오선지 새겨진 음향의 의미와 음악이 사회와 맺고 있는 다층 다양한 연관성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려 합니다. 두근 쿵쾅 설레는 마음으로 ‘조은아의 낮은음자리표’ 그 첫 이야기를 시작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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