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쓰기와 인생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말 서울을 찾은 옌롄커는 자신을 '실패한 사람', '실패한 작가'로 규정했다. 중국 최고 작가로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꼽히는 작가의 위악일까, 높은 이상에 따른 자학일까. '침묵과 한숨'에는 옌롄커가 이리 말한 이유가 담겼다. 이 책은 2013년 3, 4월 하버드대, 뉴욕대, 예일대 등 미국 주요 대학에서 진행한 강연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진 에세이다.
열두 단락으로 나뉜 책의 마지막 장 제목이 먼저 눈에 띈다. ‘나의 이상은 그저 내가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을 한 편 써내는 것뿐이다.’ 작가적 열망이 드러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소설이란 ‘작가만의 독특한 생각’.
하지만 그는 한숨 내뱉듯 “아직 완전히 새롭고 완벽한 ‘나의 독특한 생각’을 써내지 못했다”라 말한다. ‘사서’ ‘작렬지’ 같은 자신의 대표작도 아주 잘 쓴 건 아니란다. 기껏 쓴 소설이 쓰레기 아닐까 고통스럽게 자문하면서도 앞으로의 글쓰기에 대해서도 "갈수록 지금만 못할 것”이라고도 한다. 그에게 글쓰기란, 이처럼 고통스러운 사랑이다.
그래서 이 책은 작가 옌롄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 ‘딩씨 마을의 꿈’ ‘풍아송’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등 대표작의 뿌리가 된 중국, 문학, 글쓰기에 대한 그의 생각이 상세히 담겨 있다.
옌롄커 문학의 뿌리는 중국이다. “세계의 태양이자 빛인 동시에 세계의 거대한 걱정이자 어두운 그림자”인 중국은 풍부하고 부조리하며 괴상하고 초현실적이면서도 일상적이고 진실하고도 암담하다. 그런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이, 격정과 희망이, 불안과 두려움이, 옌렌커를 비롯, 중국 작가들 창작의 영양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그런 중국을, 중국인을 온전히 보여주는 중국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지금의 중국에 부합하는, ‘죄와 벌’ ‘아Q정전’ ‘율리시스’ ‘백년의 고독’ 같은 소설이 아직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라면 그런 작품을 써내지 못한 데 대해 큰 자괴감을 느껴야 하는데도, 느끼지조차 못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고 꼬집는다. 작가는 정부의 억압이 오래되다 보니 이제 중국인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고, 집단기억상실증에 걸렸다고 진단한다.
옌롄커의 탄식 한복판에는 2003년작 ‘레닌의 키스’가 있다. 마침 이 책도 때맞춰 번역, 출간됐다. 이 소설은 27년간 직업군인으로 살았던 작가를, 군 밖으로 쫓겨나게 했던 문제작이다. 물론 군대는 왜 쫓아내는지, 옌롄커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권력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레닌의 키스'의 원제는 ‘고통 속의 즐거움’을 뜻하는 ‘수활(受活ㆍ서우훠)’. 한여름에 내린 폭설로 장애인 마을이 큰 피해를 입는다. 이 마을을 구제하기 위해 관리와 마을 사람들은 장애인 묘기 공연단을 조직, 레닌의 유해를 사오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옌렌커는 이 속에다 혁명주의자와 반혁명주의자의 치열한 대립 등을 집어넣는데, 읽다보면 자연스레 중국의 근현대사가 겹쳐진다.
옌롄커의 대표작은 '레닌의 키스' 이후 나왔다. 하지만 이 책들은 중국에서 금서가 됐다. 작가 옌롄커는 '가장 문제적 작가'가 됐다. 작가도 움츠러들 수 밖에 없다. 작품에 대한 자기검열은 한창 강화됐고, 정부에다가는 해외 출판이라고 허락해줘 고맙다고 해야 한다. 나랏돈 받아 글 쓰는 중국작가협회 소속 전업작가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케 한다.
그렇기에 작가는 이 같은 현실이 곧 아우슈비츠라 정의한다. 기피 대상이 되면서 초조와 불안이, 두려움이 삶의 일부가 됐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작가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쓰는 것 뿐이다. 계속해서 써나가지만 자괴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작가는 “글쓰기로 도피와 배반을 진행할 뿐”이라 고백했다. 두려움을 가득 안은 채 지금도 옌롄커는 "훌륭하다고 여길 수 있는 소설" 한 편 써내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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