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철살인 청원으로 관심 폭발한 조은산 단독 인터뷰
"중년 작가일 것"이라는 네티즌 예상 완전히 빗나가
"진보 아니지만 현 정부 잘하길 바래 쓴소리 한 것"
청와대 국민청원에 '多(다)치킨자 규제론'과 '시무 7조' 등의 상소문을 올린 성명 불상의 한 청원인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온라인에선 그를 '진인(塵人) 조은산' 선생이라고 부르고 있죠. 마치 조선시대 선비가 환생을 한 듯 뛰어난 필력에 감탄을 자아내는 이들이 많은데요. 전혀 정체가 드러나지 않아 온갖 추측만 무성한 상황이에요.
물론 특유의 필력 덕에 많은 누리꾼들이 그를 작가로 추정하고 있어요. 일부에서는 조은산 선생의 정체를 두고 같은 이름의 소설가와 시인 두 사람 중 한명이 틀림없다는 의견도 나왔어요. 조선시대를 연상케하는 말투 탓에 나이가 지긋하지 않겠느냐는 추측이 작용한 건데, 두 작가 모두 중년이라 더욱 그 예상이 힘을 얻었습니다.
네티즌 수사대가 출동해 베일에 싸인 진인 조은산 선생을 찾기에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일보가 드디어 그를 찾았습니다. 예상과 달리 조씨는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중년도 아니었고요. 조은산도 실제 이름이 아니고 필명입니다.
조씨는 자신을 인천에서 어린 두 자녀를 키우는 평범한 30대 후반의 가장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는 27일 한국일보에 "큰 업적을 이룬 사람도, 많이 배운 사람도 아니며 그저 세상 밑바닥에서 밥벌이에 몰두하는 애 아빠일 뿐"이라며 (언론에) 이렇게 자신을 알리려니 "손이 떨린다"고도 했어요. 실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습니다.
진인 조은산, 왜 '핫' 해진 건가요?
불과 한 달 전 일인데요. 그는 지난달 14일 처음으로 '치킨계의 다주택자 호식이 두마리 치킨을 규제해주세요'라는 제목의 청원 글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리며 주목받았습니다. 치킨 브랜드의 상호를 통해 다주택자에 대한 정부의 고강도 부동산 규제 정책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내용이었어요. 주택을 치킨에 비유하고, 다주택자를 '다치킨자'로, 일시적 2주택자를 '일시적 2치킨'라고 꼬집었는데, '기막히다' '참신하다'는 반응이 쏟아졌죠.
그러나 특정 회사를 가리키는 청원 글이 비공개 처리되자 다음날 '다치킨자 규제론을 펼친 청원인이 삼가 올리는 상소문'이라는 글을 재차 올렸어요. 이 글에는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의 파직 요구도 담겨있는데요. 내용은 다음과 같아요.
폐하. 즉시적 대업으로써 역적 김현미를 파직하시고 당장 서인으로 강등시키시어 국토를 온갖 규제로 유린하고 집값을 폭등시킨 죄를 물어주시옵소서. 국토부도 모르는 청약제도를 되돌리시어 무너진 질서를 회복하시고 다시는 그와 같은 무능력자가 조정의 대사를 좌지우지하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청와대 국민청원
누가 봐도 수백년 전 조정 대신이 올린 상소문 같아 보이지 않나요?
그의 글은 8월에도 이어졌습니다. 이번엔 시무 7조를 주청한 건데요. 12일 '시무 7조를 주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니 삼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라는 청원 글을 올리고 또다시 문재인 정부의 정책 비판에 나섰어요.
또 24일에도 '진인 조은산이 뉴노멀의 정신을 받들어 거천삼석의 상소문을 올리니 삼가 굽어 살펴주시옵소서'라는 제목으로 또 다시 청원 글을 올렸는데요. 이 글에서는 김현미 장관을 비롯해 추미애 법무부 장관,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 등의 파직을 주장했어요.
"먼지같은 사람, 진인은 공사판 전전했던 과거"
소문만 무성했던 진인 조은산. 얼마 전 기자가 썼던 시무 7조 청원 관련 기사가 인연이 돼 우여곡절 끝에 그와 이메일로 연락이 닿았습니다.
그는 기자와 주고받은 이메일에서 "글과 관련된 일은 하지 않는 박봉의 월급쟁이"라고 밝혔어요. 네티즌의 추측과는 거리가 멀었던 거죠. 또 스스로를 진인, 즉 먼지같은 사람이라고 한 이유를 묻자 "일용직 공사장을 전전했던 총각 시절, 현장에 가득한 먼지와 매연이 제 처지와 닮았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베일에 쌓인 그가 누구일까를 두고 본의 아니게 같은 이름(조은산)의 작가들이 주목을 받았는데요. 특히 인천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동명이인의 시인이 자신의 글 때문에 곤란해졌다는 얘기를 듣고 더 이상의 피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에 용기를 내 한국일보와 인터뷰에 응하게 됐다고 해요.
조씨는 줄곧 현 정부를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쓰고 있죠. 그런데 그는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응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쓴소리를 하는 건 왜 일까요.
그는 "제가 가진 얕은 지식으로 현 시대를 보고 문제점을 느꼈고 그 부분을 얘기했을 뿐"이라며 "제가 지지하지 않는 정권을 향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닌, 제가 지지하는 정권의 옳고 그름을 따지며 쓴소리를 퍼부어 잘되길 바라는 것이 제 꿈"이라고 밝혔습니다. 아버지가 제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싶다는 뜻이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드러내놓고 정부 비판을 이어나갈 생각은 없다고 해요. 오히려 여기저기서 갑자기 주목하는 게 부담스럽다고 토로했는데요.
그는 "묻힌 (청와대) 청원이 온전히 공개돼 국민들로부터 동의 받을 수 있게 돼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알려지는 게 두렵다"며 "소신을 갖고 글을 쓰기 위해 평범한 소시민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싶다"고 말했어요. 또 앞서 말한 '꿈'이 이뤄질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접어줬으면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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