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회화 속 고양이에 현대적 해석 가미
에디션 제작, 실기 교본 출간 등 민화 대중화 시도
"고양이 눈처럼 밝고 맑은 세상 꿈꿔요"
고양이를 즐겨 그리는 작가는 대개 반려묘와 함께 사는 경우가 많다. 늘 함께 있기에 생동감 넘치는 표정과 특유의 몸짓을 낱낱이 포착할 수 있고, 좋아하는 마음으로 그리기에 그림에 진정성이 묻어난다. 그러나 알레르기가 심해 고양이를 키울 수 없었던 손유영 작가는 마음으로 세상 모든 고양이를 품었다. 좋아하지만 함께할 수 없는 마음이 애틋하게 담긴 그림엔 깊은 사랑과 그리움이 느껴진다. 전통회화 속 고양이를 모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현대적 해석을 가미해 고양이 민화의 대표 주자로 떠오른 손 작가를 만났다.
은행원, 민화작가 되다
원광대학교 한국학과를 졸업한 손유영 작가가 선택한 진로는 뜻밖에도 은행원이었다. 그림과 무관한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결혼과 출산을 거치면서 놓았던 붓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아이가 두 살쯤 됐을 무렵에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취미 삼아 민화를 시작했다. 학창 시절 채색화를 즐겨 그렸던 까닭인지, 순수하고 따뜻한 민화의 색감이 유독 마음을 끌었다. 꽃과 나비, 새가 등장하는 전통민화를 모사하면서 자유분방한 형태와 색감의 향연 앞에서 그림 그리는 기쁨을 새록새록 느끼던 때였다.
잊었던 전업작가의 꿈을 다시 꾸게 된 것은, 2007년 홍익대 미술디자인교육원에서 한국 민화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파인 송규태 화백을 사사하면서부터다. 시간이 정해진 교육원 수업만으론 배움이 부족하다 느껴 인사동에 있는 스승의 화실을 찾았고, 거기서 스승의 직계 제자이자 아들인 송창수 화백을 처음 만났다.
송규태 화백이 전통민화의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라면, 송창수 화백은 그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해석을 가미한 전통채색에 강점이 있는 작가였다. 각자의 방식으로 전통민화와 현대민화를 이끌어가는 두 스승을 차례로 모시면서 손유영의 작품관도 자리를 잡아갔다. 옛 민화를 모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통미와 현대적 미감의 조화를 담은 자신만의 창작 민화를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회화 모사를 넘어 창작 민화로
2013년 무렵부터 고양이 민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손유영은 작가로서 전환점을 맞이한다. 조선 시대 화원 김홍도의 <황묘농접도>를 처음으로 모사했을 때였다. 통통한 노란 고양이가 날아가는 나비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찌나 귀여운지, 그만 그림 속 고양이에 푹 빠지고 말았다.
찾아보니 조선 시대 고양이 그림에는 유독 사랑스러운 모습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섬세한 털의 묘사가 살아있고, 표정이 매력적인 도상을 골라 그림에 등장시켰다. 변상벽의 <묘작도>에서 나무 위를 올려다보는 고등어 무늬 고양이, 전(傳) 조지운의 <유하묘도>에 등장하는 노란 고양이는 손유영의 민화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다.
경기도박물관에서 8월 4일 시작한 현대민화 특별전 '경기별곡: 민화, 경기를 노래하다' 출품작 <동짓달 기나긴 밤에>에도 두 고양이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손 작가는 이 기획전의 '경기도 역사 인물을 그리다' 파트에서 황진이를 선택해 전시에 참여했다. 황진이와 고양이는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 걸까? 작가에게 물었다.
"기생인 황진이도 그리움의 대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 대상을 고양이로 환생시켜 보았어요. 혼자는 외로워 보이니까 두 마리를 그렸고요. 또한 그림 속 고양이는 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제 모습이기도 합니다. 황진이를 사모한 '또 다른 나'의 반영인 셈이죠."
소중한 인연을 그림에 옮기다
전통회화 속 고양이 도상에 상상력을 불어넣은 그림뿐 아니라, 실존하는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한 민화도 꾸준히 그리고 있다. 초창기엔 고양이 사진작가들의 책을 보며 영감을 얻기도 했지만, 요즘은 화실 수강생들의 반려묘를 모델로 한 그림이 많다. 반려묘가 된 사연을 알고 그리는 그림에는, 모르는 고양이를 그릴 때와 사뭇 다른 감정의 깊이가 담겼다. 돌이켜보니 고양이를 그린다는 건 소중한 인연을 그리는 일이기도 했다.
"동물의 생명이 인간보다는 짧기에 이별의 시간이 빠를 수밖에 없잖아요. 화실 분들이 키우는 고양이 이야기를 듣고 그리면서 위안과 기쁨, 추억까지 드릴 수 있어서 뿌듯함과 감사함을 느꼈어요. 사랑스러웠던 순간순간을 영원히 화폭에 남기는 데 그치지 않고, 달력으로 제작해 1년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고양이 달력도 만들고 있어요. 앞으로도 이 작업은 계속할 계획입니다."
그간 만난 수많은 묘연(猫緣) 중 특별히 애착이 가는 모델이 있다. 4년 전 겨울 우연히 들른 강화도의 '카페 다루지'에서 만난 고양이 라떼와 살구다. 고양이 모자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언젠가 꼭 녀석들을 그려주리라 다짐했고, 일부러 시간 내어 카페를 자주 찾았다. 엄마인 라떼는 <다루지의 그녀>란 작품으로 태어났지만, 아들 살구를 미처 그리지 못해서 사진만 잔뜩 찍어뒀던 터였다. 그러다 엄마 라떼가 로드킬로 세상을 떠나면서 살구만 남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그린 작품이 <다시 만나자>였다.
"대나무숲이 주는 평온함을 떠나간 라떼에게 선물하고 싶었습니다. 엄마랑 헤어져 홀로 남은 살구는 남은 생이 편안하길 바랐고요. 그래서 그림 속에서나마 대나무숲에 둘만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죠."
그림 속 대나무숲은 작가가 가족과 함께 다녀왔던 부산 기장군의 '아홉산 숲'을 모델로 했다. 숲속에 잠든 고양이 모자는 그의 바람처럼 더없이 평안해 보인다.
한 편의 연극 무대 같은 연출
손유영의 고양이 민화는 주인공인 고양이뿐 아니라 배경 처리에도 많은 공을 들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때로는 연극 무대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특히 '창'이라는 소재가 유독 많이 등장하는 게 이채롭다. 그에게 창은 그리움과 기다림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고양이 하면 양지바른 창가에 앉은 모습이 많이 떠오르잖아요. 때론 상념에 빠진 듯하고, 때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애잔함이 늘 마음속에 그려져요. 평소 자연을 산책하며 사계절의 변화를 관찰하고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데, 창 너머로 제가 좋아하는 꽃들을 고양이와 함께 담아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바깥 나들이도 쉽지 않은 요즘이지만, 손 작가는 기회가 될 때마다 영감을 주는 대상을 찾아 나선다. 코로나가 세계적 대유행 단계에 빠지기 전이었던 지난 1월, 민화 전문 연구가인 경주대 정병모 교수의 '민화를 세계로' 답사팀에 합류해 스페인 문화 탐방을 다녀오기도 했다.
"스페인 전통춤 플라멩고는 강렬하고 정열적이지만 그 안엔 애환이 숨어 있죠. 또 답사 도중에 알함브라 궁전을 가게 됐는데, 정교하면서도 화려한 아라베스크의 문양들이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스페인에서도 우리 그림의 강렬한 오방색과 닮은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죠."
여유롭고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고양이를 자주 만났던 스페인 여행의 기억을 되살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란 작품이 탄생했다. 궁전을 장식한 타일의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묘사에 매혹된 작가는 유명한 '두 자매의 창' 속에 고양이를 등장시켰다. 창 너머 이상세계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보는 고양이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하다.
민화 대중화를 위한 에디션 작업과 교본 출판
반려동물 산업이 성장하고 고양이 문화를 향유하려는 반려인들의 욕구가 커지면서 고양이 예술 작품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지만, 원화는 작품 크기도 크고 가격도 높은 편이라 일반 가정에서 소장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손유영 작가는 민화의 대중화를 꾸준히 시도해왔다. 민화 원화의 에디션 작업, 민화 실기 교본 출간은 그 결과물이다.
서울옥션의 미술 대중화 브랜드인 프린트베이커리의 제안으로 제작된 2종의 에디션은 평소 전시에서 많은 사랑을 받던 두 작품을 골라 제작했다. 프린트 10호 크기로 제작된 <기다림-아침인사>는 99개 에디션, 5호 크기의 <널 만난 후 봄>은 175개 에디션을 제작해 저렴한 가격으로도 고양이 민화를 소장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했다.
고양이 그림을 직접 그려보고 싶지만 시간과 거리 문제로 화실을 다니긴 어려운 이들이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도록 실기 교본 '고양이'(2018)도 출간했다. 그간 노하우를 쌓은 고양이 그림 기법을 대중화해 누구나 손쉽게 고양이를 그릴 수 있게 구성한 책이다. 유례없는 고양이 그림 교본이라서인지 은근히 찾는 이들이 많아 3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고양이의 맑은 눈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
손유영 작가의 그림에는 한국 토종 고양이나 길고양이가 많이 등장한다. 지인의 고양이를 모델로 한 그림에는 이른바 '품종묘'도 있지만, 유독 길고양이에게 마음이 간다고 한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고양이의 맑은 눈망울에 빠지게 된다. 그건 아마도 고양이의 눈처럼 밝고 맑은 세상을 기원하는 작가의 진심이 담겨서일 것이다.
"길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늘 그림에 담겨 있어요. 제 그림을 통해 많은 분들이 길고양이에 관심을 갖고 애정 어린 눈으로 봐 주시길 바라고, 소중한 생명이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울러 반려동물과 함께했던 분들이 혹시 사별의 아픔을 겪더라도 제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양이 전문 출판사 야옹서가 대표, 18년차 고양이 작가. '나는 길고양이에 탐닉한다'(2007)를 시작으로, 여행기 '고양이, 만나러 갑니다'(2010), 인터뷰집 '작업실의 고양이'(2011), 사진에세이 '고경원의 길고양이 통신'(2013), 사진집 '둘이면서 하나인'(2017)을 썼다. 2009년 9월 9일 '한국 고양이의 날'을 창안해 고양이 인식 개선에 힘쓰고 있다.
자료 제공=손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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