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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밍' 담아 12년만에 개정했지만…배포 못하는 초등보건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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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밍' 담아 12년만에 개정했지만…배포 못하는 초등보건교과서

입력
2020.09.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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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밍', '디지털 성폭력' 개념 처음 들어간 개정판
교육부 '초등 보건은 과목 아니다' 이유로 배포 못해
교과 알력다툼에 실제론 가르치며 정식교과 안돼

'함께하는 보건' 초등5학년 교과서에서 그루밍을 다루는 부분. 보건교육포럼 제공

'함께하는 보건' 초등5학년 교과서에서 그루밍을 다루는 부분. 보건교육포럼 제공


그루밍, 디지털 성폭력 등의 개념이 처음으로 교과서에 실린 개정 초등 보건교과서의 현장 보급이 발목이 잡히는 등 초등 보건교육이 10년째 파행을 겪고 있다.

사단법인 보건교육포럼 소속 보건교사들이 올해 펴낸 ‘함께하는 보건’ 초등 5학년, 6학년 교과서는 지난 달 말 경기도교육청의 사용 승인을 받았다. 2008년 보건교육포럼이 국내에서 첫번째 보건교과서를 펴낸 후 12년만의 개정이다.

이번에 개정된 교과서의 집필진인 우옥영 보건교육포럼 이사장은 대다수가 청소년 피해자였던 텔레그램 n번방 사태를 거치면서 학교의 성교육과 현실이 지나치게 동떨어진 것 아니냔 요구를 개정안에 대거 반영했다고 밝혔다. 5학년 교과서에서는 그루밍(groomingㆍ길들이기) 개념을 알기 쉽게 가르치며, 6학년 교과서에서는 디지털 성폭력과 온라인 그루밍으로 더 교묘해진 성폭력들의 발생 과정을 다루는 식이다. 우 이사장은 “초등 교과서에서 이러한 내용을 다루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피해자 단속 위주였던 기존 교과서 내용도 ‘상대방의 경계 존중하기’를 시작으로 가해자가 되지 않기를 가르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개정된 교과서는 학교 현장 배포에 애를 먹고 있다. 초등학교에는 보건과목이 없기 때문이다. 보건교과서는 교육청이 승인을 하는 인정교과서지만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교육청에서는 '교육부에서 교육과정에 보건 과목 고시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승인하지 않았다. 우 이사장은 “내년도 교과서 주문을 위해 학교 담당자들이 교과서를 미리 살펴볼 수 있는 웹사이트에도 보건교과서는 과목이 아니라는 이유로 전시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은 2008년 정식 과목이 됐던 보건교과가 2011년 초등 교육에서는 빠지면서 시작됐다. 2007년 학교보건법 개정으로 보건교사의 보건교육이 의무화됐고, 2008년 교육과정에서 보건 과목을 연간 17시간 이상 가르치도록 개정됐다. 보건교과서도 11종이 승인됐다. 하지만 2009년 교육과정과 2015년 교육과정 개정에서 교육부는 초등 보건교육 고시에서의 학년 지정과 수업 시수를 삭제했다. 한편 중ㆍ고등학교는 보건과목이 선택과목으로 지정됐다. 운영 2년만에 초등교육에서는 보건 과목이 사라진 것이다.

김대유 경기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는 “시행령인 교육과정 고시보다 상위법인 학교보건법에서 보건교육을 의무화해 놨으니 아예 보건교육을 안 할 수도 없기 때문에 현재 초등 보건 과목은 비교과인 창의체험활동 시간을 이용해 임시로 운영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함께하는 보건' 6학년 교과서에서 디지털 성폭력을 다루는 부분. 보건교육포럼 제공

'함께하는 보건' 6학년 교과서에서 디지털 성폭력을 다루는 부분. 보건교육포럼 제공


초등학교에서 보건이 정식 과목이 되지 못한 배경에는 교과간 알력싸움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당시 교육부 교육과정심의회 위원이었던 김 교수는 “(보건교사는 교직이수한 간호대 졸업생이 임용시험을 쳐야 하기에) 교육대학 교수들은 교육대학 졸업자만 교사가 될 수 있다고, 사범대 체육교육과 교수들은 보건 과목은 그간 체육교과에서 잘 가르치고 있었는데 왜 별도 과목을 만드냐며 반대를 했다”고 말했다. 또한 김 교수는 “지금은 교대쪽 뿐 아니라 보건교사들이 행정직에 남아 있어야 그들을 하부조직으로 지휘할 수 있는 일선청 보건행정직까지 반대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교육부 관계자는 “(정식 보건 과목이 없는 대신)체육 과목에 있는 보건 영역을 교과보충적 지위로서 인정교과서를 만들고, 보건 교사가 가르치는 방식으로 보건 교육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학교보건법상 체계적 보건교육 실시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보건 교육을 반드시 보건 교과서로 하라는 것이 아니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 역시 교육부와 마찬가지로 “과목이 없는데 교과서를 승인해 줄 수 없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초등 현장에서 보건교육은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 보건교사 사기 하락 등 10여년간 파행 운영됐다는 지적이다. 2008년 만들어진 보건교과서가 지금까지 개정되지 못하고 12년째 사용되면서 보건교사들은 한 쪽에서는 ‘피해자를 조심시키는 내용을 담은 보건 교과서는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비판을, 반대편에서는 ‘보건교과서에서 성기가 너무 노골적으로 그려져 있는 것 아니냐’는 공격도 동시에 받는다는 것이다. 우 이사장은 “보건이 정식 교과목으로 채택되지 않은 상황에서 보건교사들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고 말했다. 2018년 당시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표한 초ㆍ중ㆍ고 각 1개 학년 17차시 이상의 보건교육 실시율은 초등학교 약 80%, 중ㆍ고등학교 약 40~50% 수준이다.

우 이사장은 “현재 새로운 보건교과서를 기다리는 학교도 있는데 이런 이유로 교과서 선정이 미뤄지는 것은 아이들에게도 결코 유익하지 않다”며 “교육이 현장에서 잘 이뤄지게 하기 위한 잣대와 기준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박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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