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국뽕'과 '헬조선' 사이
밀레니얼에게 국가란 무엇인가
맹목적 애국심 강요는 거부감
'나에게 어떤 영향'이 절대기준
편집자주
이슈와 화젯거리를 이야기할 때 기성세대는 자주 핏대를 세웁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워낙 크다 보니 밀레니얼 세대는 의견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의견 표출의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한국일보 인턴기자들이 기성세대와는 다른 밀레니얼의 시각을 담아 한국 사회를 ‘언박싱’ 해보겠습니다. 밀레니얼의 솔직한 체감지수를 느껴 보세요.
지난 10일 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핫100' 차트 2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면서 K팝이 다시금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 초 아카데미상을 휩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은 국민적 자존감을 높여 주기도 했습니다. 대중문화 영역뿐만 아니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에서도 성과를 냄으로써 ‘K-방역’이라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K방역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 3주년 연설에도 등장할 정도로 이제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습니다. 이런 소식들은 국민들에게 기쁨을 주고, 소속감을 높이면서 ‘국뽕’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대한민국 혹은 한국인들이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면, 우리 주변에서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이 쉽게 발견됩니다. ‘BTS 음악 깔고 불닭볶음면 먹으면서 일본 욕하는 콘텐츠는 100만뷰가 넘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밀레니얼 세대도 국뽕 콘텐츠를 많이 소비하며 즐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뽕 열풍과 동시에 젊은 세대는 시도때도 없이 ‘탈조선’, ‘탈한국’ 등을 읊어 왔습니다. 국뽕과 탈조선은 모순된 측면이 있지 않냐고요. 그래서 젊은이들에겐 '국가란 과연 무엇인가'란 근본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대한민국이란 무엇인지, 어떤 가치관으로 국가를 바라보고 있는지, 밀레니얼이 생각하는 ‘국뽕’을 언박싱 해봅니다.
'국뽕'에 취하지만 개인적 취향 불과
분당동 갈치발(분갈): 옛날에 그런 거 있었잖아. ‘두유 노’ 시리즈(외국인들에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우리나라 문화를 알고 있는지 반복해서 질문하는 것). ‘두유 노 김치’, ‘두유 노 싸이’ 같은 거. 최근엔 유튜브에서 한국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나 공연 영상을 외국인들이 즐겨 보면서 그들의 리액션 반응을 보는 영상이 굉장히 많아졌어.
양꼬치엔 닭꼬치(양닭): 나는 스포츠에 관심이 많다 보니 스포츠 스타들을 보면서 국뽕을 맞는 경우가 많아. 손흥민은 기본이고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류현진, 김광현 등등.
줌으로 공부함(줌공): 확실히 최근에 그런 국뽕을 주제로 한 유튜브 영상 콘텐츠들이 많아졌어. 그런데 나는 아이돌엔 관심이 없는 반면 스포츠는 챙겨보기 때문에 방탄소년단 소식을 들었을 때는 별로 감흥이 없었어. 국뽕도 관심사에 따라서 느끼는 정도가 다른 것 같아.
티나: 그러면 다들 ‘국뽕에 취한다’고 할 때 다들 어떤 기분인가.
양닭: 나는 사실 ‘대한민국’이라는 자부심보다는 나랑 같은 국적의 사람이 저렇게 대단한 성과를 낸 것에 대한 경외감 정도가 생겨.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은 생기지만, ‘아 역시 대한민국이 최고야!’까지는 아니야.
줌공: 생각해보면 국뽕의 초점이 개인으로 향하니까 그런 것 같아. 봉준호면 봉준호. BTS면 BTS. 그 대단한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만족감은 대리만족에 가깝잖아. ‘우리나라는 역시 대단해’ 이런 느낌이랑은 다른 감정인 것 같아.
티나: 국뽕을 '애국적 나르시시즘'이라고 정의하는 사람도 있어. 나르시시즘(자기 자신에게 애착하는 일로 정신분석학적 용어)의 속성에 애국적 의미가 가미됐다는 거지. 한국이라는 국가에 자부심을 갖기가 어려운 나 같은 사람은 국뽕이라는 형태로 취할 수가 있는 거지. 그런 점에서 국뽕은 기존 세대들이 품고 있는 애국과는 결이 다른 것 같아.
줌공: 그래서 국뽕은 단기적이고 소비성 콘텐츠의 성격이 강한 것 같아. 애국은 좀 더 지속적인 감정이면서 그 대상이 추상적인 국가에 한정되잖아.
양닭: 유럽 선진국인 프랑스나 영국 사람의 경우 평소에도 자기 나라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한 걸로 알고 있어. 영국 사람의 경우 대영제국 시절의 역사가 있고, 프랑스 사람의 경우도 다른 언어를 잘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하잖아.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국뽕'이라는 느낌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아.
귀한곳에 누추한분(귀누): 그런데 가끔은 과도한 국뽕 마케팅에 질릴 때도 있어. '명량'이나 '국제시장'처럼 애국심을 자극해서 흥행한 영화들은 오히려 거부감이 들더라고. 예전에 유행했던 ‘두유 노 싸이’도 그렇고. 너무 인위적으로 국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 같아. 외국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런 콘텐츠들은 나도 모르게 기피하게 돼.
분갈: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힘든 일이 많아서,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국뽕’이라는 형태로 주입하는 것 같아. ‘건국 이래 최대 번영’이라는 말처럼 이제 선진국 반열에 올랐으니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런 자부심을 누리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
애국심 없어도 가끔 국가 존재감은 인식
줌공: 그럼 평소에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을 언제 많이 받나.
분갈: 예전에는 국가의 존재를 별로 느끼지 못하면서 살아왔는데, 코로나 시국 들어서서 방역 때문인지 존재감을 크게 느끼고 있어.
티나: 맞아 맞아.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 정체성이 보이기 시작했어. 한국인들 사이에선 내가 한국인이란 걸 평소에 의식하지 않고 살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국가별로 입국 금지하고 국가별로 전염병 확진자 수가 매일 발표되니 비교가 될 수밖에 없어. 그런 점에서 요즘 국가의 존재를 많이 느껴.
줌공: 그렇구나. 나는 국가의 존재를 거의 못 느끼면서 살아. 일단 ‘나’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국가는 없다시피 해.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언가를 결정하는데 영향을 끼치거나 그걸 의식하면서 살지 않아.
양닭: 오, 국가의 존재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구나. 나 같은 경우엔 나를 구성하는데 국가가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그게 ‘나라를 위해서’ 혹은 ‘나라에 충성하겠다’ 이런 건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더 나은 국가를 만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꺼이 하고 싶어.
귀누: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이 '내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는 어쨌든 한국인이고 한국어를 쓰면서 살아간다는 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그래서 그런지 나에게 큰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나라를 위해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할 수 있을 것 같아.
분갈: 나 역시 고등학교 때까지는 공교육을 열심히 받아서 애국심이 있었어.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고 미투가 엄청 많이 터졌는데 그때 비로소 국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 성별로서의 정체성이 우선한다는 걸 깨달았어. 소속된 집단에 대한 애정이 중요한 사람이었는데, 국가에 대한 정체성이 어느 순간 나에게 위협으로 변질되더라고. 그래서 국가를 떠올리면 언제부터인가 환멸과 냉소로 대할 때도 있어.
티나: 나도 내 집단에 ‘한국’은 안 들어갈 것 같아. 오히려 세대, 성별 이런 게 더 영향을 끼치고 있어.
줌공: 내가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를 단 한 번도 ‘좀 더 나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 나는 글 쓰는 게 좋고, 적성에 잘 맞아. 그래서 글 쓰면서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기자’라는 직업이잖아. 그리고 국적과 인종을 떠나서 다른 사람들을 간접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도 보람을 느낄 수 있잖아.
분갈: 사명감 얘기가 진로와 관련해서 꼭 나오지만, 나 역시 국가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내가 공감할 수 있고 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양닭: 그러면 ‘국민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티나: 국민성이라는 건 존재하지도 않고 전근대적인 사상이라고 봐.
줌공: 맞아.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인의 국민성이 굉장히 미개하다고 말하잖아. 그래서 중국에서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중국’을 욕하고, ‘중국인’이라고 통칭해서 비난하더라고. 나는 전혀 맞지 않다고 생각해. 중국 안에도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야. 요즘 시대에 국가를 기준으로 어떤 사람을 평가하는 건 있을 수도 없고 옳지 않다고 생각해.
펭수야 사랑해(펭사): 나는 국민성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어. 왜냐하면 어릴 때 중국에서 잠깐 살았는데 문화적으로 우리랑 매우 달랐어. 감독 없이도 급식실에 줄 서서 차례대로 배식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데, 중국에서는 그게 당연하지가 않아. 새치기는 일상이고 관공서에서도 마찬가지야. 국민성이 너무 거창한 개념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나라마다 공유하는 문화는 조금씩 다른 것 같아.
양닭: 국민성은 마치 기본값처럼 살고 지내면서 체화되기 마련이야. 그런 것들이 좋을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지. 그렇다고 개별적인 사건마다 원인을 국민성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물론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묻는 것도 무리일 거고.
‘국뽕’과 ‘헬조선’ 스펙트럼 극과 극
귀누: 개인적으로 같은 세대에게 국뽕을 느낀 건 ‘반일불매운동’ 때였어. 처음에는 너무 신기했어. 평소엔 나라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고, 한국한테 도움받은 거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면서도 불매 운동은 열심히 하더라고.
줌공: 나는 딱히 반일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어. 오히려 주변 친구들이 하는 걸 보면서 ‘매일매일 한국 욕하면서 왜 저렇게 열심히 참여할까’라는 생각이 들었어. 확실히 그 부분은 이해가 안 갔어. ‘헬조선’ 외치면서 반일불매운동엔 열심인 거 말이야.
티나: 한편으론 그게 꼭 모순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다고 봐. 내가 불매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우리나라를 위하는 마음보다는 일본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야.
펭사: 일본이 싫은 것도 우리나라에 역사적으로 나쁜 짓을 해서 그런 거 아닌가. 만약 일본에서 태어났다면 그런 문제를 느끼지 못했을 것 같아. 일본에 대한 반감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기저에 깔렸기 때문이 아닌가. 그래서 ‘헬조선’, ‘탈조선’만 외치는 거는 모순이라고 생각해.
티나: 내가 불매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반일감정 때문이 아니라 ‘보복성 수출규제’라는 특정 사안에 대해 분노한 거야.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정당한 배상을 하라고 했을 뿐인데, 수출규제로 대응한 일본의 행위는 문제라고 생각해. 내가 한국사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이었어도 불매운동에는 참가했을 것 같아.
귀누: 맞아. 내가 한국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동안 배워온 게 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분노하는 거라고 생각해. 거기에 일본이 수출규제까지 한다니까, 나쁜 놈들이라고 생각하게 된 거지.
양닭: 국가를 대하는 태도가 우리 세대는 더 다양해진 거 같아. 과거에는 ‘잘 먹고 잘 살자’는 구호 아래 무조건 '우리나라 최고'를 외쳐야 했다면, 지금은 개인주의가 확산하면서 국가라는 개념도 많이 약해졌어. 그러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는 거지. 그래서 ‘헬조선’이라는 단어도 나오는 거고.
귀누: 지금은 맹목적으로 나라를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의 복합체로 보기 시작한 것 같아.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느냐가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 잡았으니까.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진 않지만, 취업이 힘들고 여성으로 살아가기 힘든 건 맞으니까.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나라 전통문화라든지 국가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BTS가 잘나가면 물론 기분 좋고. 이제는 국가를 하나의 개념으로만 설명하기가 힘들어졌어.
줌공: 동의해. 국뽕을 외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라를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고, 헬조선을 외친다고 해서 무조건 나라를 싫어하는 건 아닌 거지.
분갈: 그리고 국뽕은 개인적이고 단발적인데, 헬조선은 국가의 체계 자체를 비난하는 측면이 크잖아. 국뽕으로 아무리 긍정적인 느낌이 생겨도, 헬조선에 대해 느끼는 부정적인 생각을 완벽히 커버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아.
귀누: 맞아. 생각보다 국뽕을 느끼는 건 사소한 부분이야. 예를 들면 커뮤니티에서 과일 트럭이 전복됐는데 사람들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짤' 같은 거라고 할까. 그런 사건들을 보면서 마음의 안정과 위로를 일시적으로 찾는 거지.
양닭: 그런 부분에선 우리 모두에게 어느 정도의 국뽕은 필요한 것 같네. 가끔 국뽕을 맞아야 할까.
정리=노지운 인턴기자
참여=김단비, 왕나경, 이인서, 장수현, 장채원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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