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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기를 막은 건 경제학자가 아니었다

입력
2020.09.14 15:00
수정
2020.09.14 16:44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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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진
차현진한국은행 연구조정역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라임과 옵티머스 사태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다. 투자자들이 사기를 당했다고 아우성이다. 금융 사기는 어느 나라에서나 큰 골칫거리다. 피해자가 많아, 자칫하면 금융시스템 전체를 피폐하게 만든다.

1825년 영국의 금융 공황이 그랬다. 100년 전에 만든 버블방지법(1720년)을 폐지하면서 정부가 해외 투자 분위기를 과하게 띄운 탓도 있지만, 발단은 조지 맥그리거의 사기극이었다.

맥그리거는 오늘날 카리브해 부근에서 근무하던 해군 장교였다. 1820년 퇴역해 고향으로 돌아온 뒤 허풍을 떨었다. 오늘날 온두라스 부근의 포야이스라는 왕국에서 자기가 존경받는 총독이었다는 것이다. 그곳의 왕과 원주민들은 자신이 떠나올 때 넓은 영토와 천연자원 채굴권을 선물로 주었다고 자랑했다.

아무 증거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쉽게 넘어갔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면서 국채 발행이 줄어들고 금리가 낮아지자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던 사람들은 금과 은이 넘친다는 미지의 세계에 귀가 솔깃해졌다.

맥그리거는 포야이스에 도시를 세우고 광산을 개발한다면서 투자자를 모았다. 모험심이 많은 사람들을 향해 제2의 인생을 시작하자고 이민을 모집했다. 변호사, 의사, 은행가와 같이 학식 있는 사람이 긴 줄을 섰다. 1822년 9월 그들을 실은 배가 런던항을 출발했다.

봉이 김선달이 팔아먹은 대동강은 그나마 실체라도 있었다. 그러나 포야이스 왕국은 완전한 허구였다. 투자자들이 현지에 도착하여 발견한 것은 정글과 적막한 해변, 그리고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내팽개져 있던 난파선 잔해들뿐이었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투자자들은 배신감 속에서 다시 영국으로 발길을 돌렸으나 상당수가 배 안에서 열대병으로 죽어 나갔다. 돌아온 사람은 3분의 1에 불과했다. 1823년 런던항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맥그리거를 찾았지만, 이미 돈을 갖고 튄 뒤였다. 그는 베네수엘라에서 영국 귀족으로 행세하다가 늙어 죽었다.

맥그리거의 사기극이 들통나면서 영국 전체가 패닉에 빠졌다. 런던에서 내로라하는 대형은행 6개가 파산했고, 지방은행의 파산은 셀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 와중에 살아남은 소형 은행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폴 앤 손튼 상사'가 그중 하나였다. 그 은행의 임원 헨리 손튼은 25세 생일날 아버지한테서 은행을 상속받은 왕초보 은행가였다. 직장생활 넉 달 만에 금융 공황이 닥쳐 예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헨리는 망연자실했다. 그러다가 삼촌 친구인 영란은행 총재의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영란은행은 런던에서 65마일 안에서만 영업하는 상업은행이었고, 은행권 발행에도 제한을 받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은행 사정을 봐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로버트 젠킨슨 수상이 총재를 불렀다. 사태가 절박하니 발권한도를 무시하고 일단 대출을 늘리라고 압박했다. 전례나 법적 근거는 전혀 없었다.

영란은행 총재는 떨떠름했지만, 마침 집을 찾아온 조카뻘의 헨리에게 40만 파운드짜리 수표를 끊어줬다. 생각지도 않은 거액을 받은 헨리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튿날 영란은행 창구에서 수표를 현찰로 바꿨지만, 별로 필요는 없었다. 영란은행이 나섰다는 소문이 나자 예금 인출 행렬이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오히려 예금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최종대부자 역할의 탄생이었다.

최종대부자 역할은 경제학자나 영란은행이 아닌, 수상의 머리에서 나왔다. 그때 경제학자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헨리의 외증손자인 에드워드 포스터가 집안 어른들의 일화들을 묶어 발간하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졌다.

포스터의 직업은 소설가였다. 그의 대표작은 '기계, 멈추다'라는 공상과학소설이다. 인류가 멸종의 위험을 겪은 뒤 지하에서 ‘글로벌 머신’에게 서로 격리된 채 사육된다는 줄거리다. 그러다가 지상의 잔류파 인류와 힘을 합쳐 기계들을 물리친다. 90년 뒤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와 똑같다.

오래 기억되는 역사에는 재미가 있다. 최종대부자 역할의 우연한 탄생이 오래 기억되는 까닭은 소설가의 문장력 덕택이다. 거기에 경제학자가 기여한 것은 없다. 이 칼럼이 재미를 추구하는 것도 기억을 위해서다. 이 이야기가 솔깃하다고 해서 필자를 맥그리거 같은 사기꾼으로 오해하지 마시라.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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