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국립생물자원관 전문가들이 동ㆍ식물, 생물 자원에 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3주에 한 번씩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메뚜기는 풀밭에 살면서 울음소리를 내는 특징이 있으며 짝을 찾기 위한 감각으로 시각과 청각이 잘 발달한 곤충입니다. 여름과 가을에 걸쳐 메뚜기들이 내는 다양한 울음소리와 함께 이들의 짝짓기에 얽힌 생태 이야기를 소개하겠습니다.
뚜렷한 성적 이형
암수가 겉으로 잘 구별되지 않는 곤충들이 많지만 메뚜기들은 외형만으로 암수 구분이 뚜렷합니다. 우선 암컷은 배 끝에 길게 나온 산란관이 있습니다. 산란관은 알을 낳는 기관인데 칼이나 창, 바늘, 낫, 갈고리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한편 수컷은 앞날개 시맥이 복잡하고 소리를 내는 울음판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암컷이 수컷보다 커서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암수의 색깔과 날개 모양이 전혀 다른 삽사리나 청날개애메뚜기는 암수가 짝짓기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같은 종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몸의 비율상 수컷은 항상 암컷보다 더듬이가 더 길고 겹눈이 더 큽니다. 수동적인 암컷에 비해 수컷은 적극적으로 암컷을 찾기 위해 감각기관이 발달한 편입니다.
풀밭과 나무 위에서 울기 시작
여름이 오면 메뚜기 애벌레들이 날개를 달고 일제히 성충으로 우화하고, 수컷들은 서서히 다리나 날개를 떨며 울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짧고 단순한 소리를 단발적으로 내다가 성숙해짐에 따라 점점 길고 완성도 높은 소리를 냅니다. 습성에 따라 낮에 우는 메뚜기 무리와 밤에 우는 베짱이 무리로 크게 구별할 수 있는데, 어느 것이나 암컷을 근처로 유인하기 위해 수컷이 적극적으로 소리를 냅니다.
땅바닥 돌 밑이나 땅굴 속에서는 귀뚜라미와 땅강아지, 낮은 풀숲에서는 긴꼬리와 방울벌레, 가시덤불 속에서는 여치와 철써기, 그리고 키 큰 나무 위에서는 중베짱이와 청솔귀뚜라미가 소리를 냅니다. 이 장소들은 주서식 환경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소리를 가장 뽐낼 수 있는 선택적 공간이기도 합니다. 소리는 사인 곡선(sine curve)을 그리는 물결 파동으로 굴절, 반사, 회절, 증폭, 공명 현상을 겪는데 이런 물리적 특성을 이용해 자신의 소리를 가능한 먼 곳까지 전달하려고 애씁니다. 도시에 사는 귀뚜라미는 건물 구석이나 인공 구조물의 빈 곳을 활용하기도 합니다. 모두 자신의 소리를 돋보이게 하는 전략입니다.
울음소리를 내는 다양한 방식
외골격의 단단한 껍질을 갖춘 메뚜기는 소리를 내기에 적합한 신체 조건을 갖고 있습니다. 소리 생성의 원리를 살펴보면, 우선 낮에 우는 메뚜기들은 뒷다리를 재빠르게 앞뒤로 움직여 앞날개에 비빌 때 소리가 납니다. 뒷다리 안쪽에는 까끌까끌한 돌기가 줄지어 있는데, 이것을 날개맥에 마찰시켜 소리를 생성합니다. 반면 밤에 우는 베짱이와 귀뚜라미는 앞날개를 좌우로 비비는데, 양쪽 앞날개는 긁는 부분과 소리를 증폭하는 부분이 나뉘어 있어 현악기와 비슷합니다. 앞날개를 번쩍 세우고 가슴근육이 빠르게 수축, 이완할 때 마찰음이 발생해 공중으로 멀리 전달됩니다. 날아갈 때만 소리를 내는 방아깨비나 콩중이도 있습니다. 비행할 때 ‘따다다닥’ 하는 경쾌한 소리가 납니다. 귀뚜라미나 방울벌레의 울음소리는 사람의 가청 주파수 영역에 가까워 대부분 잔잔하고 듣기 좋지만, 매부리나 여치베짱이 등의 높은 소리는 초음파 영역에 가까워 귀에 거슬리는 편입니다.
짝짓기 경쟁
메뚜기는 다윈이 제안한 성 선택 이론을 잘 보여주는 훌륭한 모델입니다. 수컷들 간의 외적인 경쟁과 암컷들의 은밀한 정자 선택 이론을 모두 보여줍니다.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붙어있는 메뚜기 커플을 관찰한 결과, 실제 짝짓기하는 시간은 채 30분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몇 시간씩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수컷의 접근을 막기 위해 암컷을 호위하는 행동입니다. 곤충의 세계는 다부다처제가 보통인데, 암컷의 배 속에는 저정낭이 있어 짝짓기한 수컷의 정자를 알 낳을 때까지 보관할 수 있습니다. 정자에 비해 난자의 수가 턱없이 부족해 보관된 정자 중 가장 마지막에 짝짓기한 수컷의 정자가 대부분의 알을 수정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고자 산란 직전까지 다른 수컷의 접근으로부터 암컷을 지키려고 합니다. 수컷 밑들이메뚜기 중에는 특히 앞다리, 가운데다리가 보디빌더처럼 굵은 종들이 있는데, 암컷에게 강하게 붙어있기 위한 경쟁으로 발달한 특징입니다. 인기 있는 암컷에게는 흔히 수컷 2~3마리가 붙어서 서로 발로 차고 떨어뜨리려는 짝짓기 경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아예 수컷들끼리 치고받는 싸움을 벌이는 종도 있습니다. 수컷의 머리가 크고 납작한 모대가리귀뚜라미는 수컷들끼리 만나면 머리를 서로 디밀며 힘겨루기를 합니다. 탈귀뚜라미도 박치기와 깨물기, 사납게 울기를 반복하며 수컷들 간의 경쟁이 치열합니다.
눈과 귀와 입을 즐겁게
메뚜기는 암컷이 신체적으로 더 큰 까닭에 수컷이 무조건 암컷에 달라붙는다고 짝짓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암컷이 준비가 안 되었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힘센 뒷다리로 걷어차 떨어뜨리니까요. 수컷들은 이러한 열세를 벗어나고자 갖은 애교로 암컷의 환심을 삽니다. 우선 수신호를 하는 종류가 있습니다. 더듬이나 앞다리가 유별나게 굵은 종, 혹은 뒷다리 안쪽에 특징적인 무늬가 있는 종들은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는 부위를 깃발처럼 흔들어댑니다. 울음소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수컷의 품질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좋은 징표입니다. 암컷은 대개 굵고 낮은 중저음을 선호하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무거운 체중을 반영합니다. 수컷들은 멀리 있는 암컷이 가까이 다가오도록 유인음을, 암컷이 가까이 다가와 옆에 있으면 교미음을, 그리고 짝짓기를 마친 후에도 암컷을 달래는 후희음까지 다양한 의미의 소리를 냅니다.
한편 암컷에게 먹을 것을 선물로 주는 종류도 있습니다. 긴꼬리 수컷은 날개 밑 앞가슴샘에서 분비물을 내어 암컷이 그것을 핥는 동안 교미가 이루어집니다. 또한 자신의 뒷날개나 뒷다리 가시를 뜯어먹도록 허락하는 수컷도 있습니다. 여치류가 교미 시에 내놓는 정자 주머니는 매우 크고 특별한 선물입니다. 어떤 경우 수컷 체중의 30%를 차지할 만큼 커다란데, 정자를 제외한 주머니의 주성분은 젤라틴 단백질입니다. 실제로 암컷은 짧은 짝짓기를 마치고 떨어지고 나면 조용한 곳에서 배 끝에 부착된 정자 주머니를 천천히 뜯어먹습니다. 정자 주머니가 크면 클수록 좋은데, 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그동안 정자는 안전하게 암컷의 몸 속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과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이렇게 수컷이 제공한 영양물질을 섭취한 암컷이 결국 더 많은 알을 낳을 수 있다고 합니다.
수컷이 암컷을 선택하기도
풀밭을 걸으며 천천히 메뚜기 소리를 듣다 보면 울음소리를 내는 수컷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식처에 대한 독점성이 강한 수컷들은 서로의 소리를 알아듣고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 영역 안으로 암컷이 들어오면 대환영이지만, 낯선 수컷이 침범하면 싸움이 벌어집니다. 반면 세력권이 약한 종의 경우 한 곳에 집단으로 모여 커다란 합창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유난히 선명하고 뚜렷한 풀벌레 소리를 따라 가보면 인기 만점의 수컷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마리의 줄베짱이 수컷 주변에 4마리의 암컷이 모인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수컷보다 암컷의 수가 많을 때는 수컷이 암컷을 고르기도 합니다. 특히 수컷이 커다란 정자 주머니를 만드는 종은 1회의 짝짓기에 많은 투자를 하는 관계로 짝짓기를 자주 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수컷은 등 위에 암컷을 올려 보고 가장 무거운 암컷과 교미합니다. 그렇지만 수컷이 암컷을 골랐다고 하여 자신의 유전자가 몽땅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암컷은 또 다른 수컷과 짝짓기할 수 있고 실제로 암컷 배 속의 저정낭은 길고 배배 꼬여있는 경우가 많아, 생식세포 수준에서 내밀한 선택이 일어납니다.
도청꾼과 흉내쟁이
풀벌레 울음소리는 자신의 짝을 애타게 찾는 소리지만, 의도치 않게 천적을 불러들여 자신의 세레나데가 죽음의 노래가 되는 일도 있습니다. 소리 엿듣기 혹은 신호 가로채기 현상입니다. 기생파리 중에는 메뚜기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특별한 귀를 가진 종류가 있습니다. 기생파리 암컷이 귀뚜라미나 베짱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몰래 숙주에게 접근해 떼기 어려운 곳에 자신의 알을 낳아 붙입니다. 부화한 구더기가 숙주의 숨구멍을 통해 내부 장기로 잠입에 성공하면 서서히 영양분을 갈취해 자라고 결국 번데기에서 기생파리가 나오면 숙주는 죽습니다. 곤충 소리를 성대 모사해 사냥하는 재주꾼 새도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쏙독새는 땅강아지 소리를 기가 막히게 흉내 내는데, 같은 종인 줄 알고 접근한 땅강아지를 잡아먹습니다.
후세를 남기고 내년을 기약
왕성하게 활동하던 한 해가 저물어 가면 날씨와 함께 메뚜기의 행동도 변합니다. 밤이 추워지면서 여름철 밤에 울던 녀석들이 가을에는 한낮에도 울기 시작합니다. 변온동물인 곤충은 특히 온도에 민감해 고온에서는 열심히 빠르게 울지만, 저온에서는 천천히 느리게 웁니다. 그래서 귀뚜라미 울음소리의 박자를 계산하면 기온을 알 수 있다고 해 ‘온도계 귀뚜라미’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기온보다는 울음소리를 내는 메뚜기의 체온 상태가 더 중요한데, 똑같은 기온에서도 그늘에 있으면 천천히 울고 햇볕 아래에 있으면 빠르게 웁니다.
짝짓기를 마친 암컷은 저마다 선호하는 장소에 알을 낳습니다. 여치나 귀뚜라미는 긴 산란관을 땅에 푹 꽂으며, 메뚜기는 평소보다 배가 길게 늘어나 땅속 아래 깊숙이 알을 낳습니다. 산란을 앞둔 암컷은 땅 밑 환경이 내년 봄까지 알을 무사히 보존하기 적합한지 온도 및 습도와 토질 상태 등을 점검하고 마음에 들 때 알을 내려 보냅니다. 나뭇가지나 잎사귀를 썰어 조직 사이에 알을 낳는 종류도 있습니다.
번식기가 끝날 무렵 늙은 수컷들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 노래를 부르는데, 우리 귀에는 애처롭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도 별로 무서워하거나 도망치지 않습니다. 아마도 짝짓기는 이미 마쳤을 텐데, 왜 우는 것일까요. 곤충 시인 파브르는 이런 답변을 했습니다. 그들은 삶의 환희를 노래하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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